▲ 모바일 아티스트 장홍탁씨가 그린 김란사씨 (제공: 서울교육박물관)

‘신여성 김란사 세상을 밝히다’ 전시회
‘게이오대 조선인학생 친목회’ 사진 첫 공개

국내 여성 최초 美학사 학위 취득
‘호랑이 선생님’ 불릴 만큼 교육 엄격
배움 놓친 여성 위해 영어·성경 교육
日침략 부당함 알리러 가다가 타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나의 인생은 이렇게 한밤중처럼 깜깜합니다. 내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1894년 이화학당 입학당시, 김란사 여사는 프라이 학장에게 이같이 말했다. 그가 이곳에 찾아간 이유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국가를 지키기 위해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학당은 초창기와 달리, 학생이 늘어나 기혼 여성까지 받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김란사 여사의 확고한 의지와 깊은 뜻에 프라이 학장은 입학을 허락했다.

김란사 여사는 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 여성과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산화한 인물이다. 이와 관련, 서울시교육청정독도서관(관장 김희선) 부설 서울교육박물관은 3.1절을 기념해 ‘신여성 김란사 세상을 밝히다’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게이오대 조선인학생 친목회’사진이 최초 공개된다. 전시는 이달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다.

◆새로운 삶 찾아 나서다

1893년 인천감리서 하상기와 결혼한 김란사 여사는 여성도 교육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자 1894년 이화학당에 입학한다. 이후 서재필의 남녀평등에 관한 연설을 듣고 유학을 결심한다. 그는 일본 동경 게이오대학에서 1년간 유학하고, 1900년부터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문과에 입학해 6년 만에 우리나라 여성최초로 문학사 학위(B.L.Bachelor of Literature)를 받았다.

김란사 여사는 1872년(고종9)에 평양에서 아버지 전주 김씨 김병훈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경성(당시 서울)으로 이주해 서울 평동 32번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아버지의무역업을 도우며 자랐다.

‘김하란사’라는 이름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남편의 성을 따르는 외국 문화에 따라 남편의 성을 같이 사용하게 된 거다.

▲ 최초 공개되는 ‘게이오대 조선인학생 친목회’ 사진. 김란사 여사가 흰 옷을 입고 있다. (제공: 김란사 여사의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여성을 위한 헌신

190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 1907년 상동교회에서 불우하거나 기혼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친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오늘의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며 여성과 민족문제를 고민했다. 1909년 박에스더, 윤정원과 함께 고종황제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은장을 수상했다.

◆이화학당 품으로

1909년 이화학당 총교사(교감)로 재직하면서도 매일학교, 애오개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여학교, 한강여학교에서도 지도교사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릴 만큼 교육에 있어 엄격했다는 김란사. 유관순 열사도 김란사 여사의 제자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1년에 김란사 여사가 기고한 영문선교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두 가지 가정 일에 대한 불평이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다음 사실만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정규 고등학교 졸업생이 그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개화파 윤치호(출소 후 친일파 됨)가 한국에서의 여성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에 반박하기 위해 실은 기고였다.

◆나라의 뜻을 받들다

김란사 여사는 단순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의 위기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여성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했고,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한 항일독립운동에 뜻이 향해 있었다.

그는 영어 실력이 능통해 고종의 통역도 맡아 독립운동의 연락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고종의 아들 의친왕을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 조선의 억울함 등을 알릴 계획이었지만, 그해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 직접 가게 됐고, 비밀 파송 중 북경에서 교포들이 주최한 저녁식사에 참석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장례식에 참석한 선교사 베커는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여인으로서 오직 나라의 독립을 걱정했던 김란사 여사. 혹독한 그의 훈련은 제자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줬다. 또 그는 여성도 독립을 이루는 데, 한 줄기의 빛이 될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참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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