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1973년에 이뤄진 발굴조사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천년고찰 불국사 ⓒ천지일보(뉴스천지)

1969년 발굴 계기로 대대적 복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올라
국보·보물 12점 그야말로 보물창고

10원짜리 동전 속 주인공 다보탑
일제, 해체·보수한다며 일부 가져가
돌사자 넷 중 머리 깨진 한 개만 남아

석가탑에 얽힌 슬픈 사랑의 전설
신라 예술성에 대한 찬미 담긴 듯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가수 현인이 부른 노래 ‘신라의 달밤’은 그의 독특한 창법 덕분인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도대체 불국사의 종소리가 어떠하기에 노래로까지 엮였을까 생각하니 궁금증이 더욱 커진다.

신라의 천년고도(古都)로 명승고적이 많아 문화재의 보고로 불리는 경주. 이곳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불국사’다.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불국사(사적 제502호)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발원해 개창되고 혜공왕 10년(774)에 완성됐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던 것이 1969~1973년에 이뤄진 발굴조사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복원해 현재 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비록 신라시대 대규모 복합 건축물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석굴암과 더불어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를 정도로 의미 있는 곳이다.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인 불국사는 고대 불교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을 안치했다.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북아 고대 불교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불국사 경내에 있는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삼층석탑(국보 제21호),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국보 제22호), 청운·백운교(국보 제23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삼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6호) 등 7점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사리탑(보물 제61호), 석조(보물 제1523호), 대웅전(보물 제1744호), 가구식 석축(보물 제1745호), 영산회상도·사천왕 벽화(보물 제1797호) 등 5점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야말로 문화재의 보고다.

▲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져 있어 더욱 익숙한 다보탑에는 원래 네 개의 돌사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사라진 돌사자상은 어디에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당시 동일한 외관을 가진 탑 한 쌍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다보탑은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한다.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져 있어 더욱 익숙한 다보탑에는 원래 네 개의 돌사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인 1925년경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리, 사리장치 등과 함께 사라져 단 한 마리만이 남았다. 사자상의 머리(얼굴) 부분이 깨져 있는 것으로 봐서 약탈 당시 그냥 두고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툭 불거진 앞발이 다부진 인상을 주는 사자상은 과하지 않은 갈기의 표현과 한쪽으로 살짝 치우친 모습이 역동성마저 느끼게 한다. 훼손된 부분이 있어 아쉽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뤄 그 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아름다움이 탐나서였던가. 사자상을 들고 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일제에 의해 그 형제를 빼앗긴 돌사자상이 언제까지 홀로 외로이 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잠시나마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해 먼저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네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유형의 문화재를 되찾아 온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무형의 역사와 정신까지 되찾아 오는 것임을 되새기며 속으로나마 돌사자상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네 형제가 함께했을 때는 다보탑 기단 사면(四面)에 각각 한 마리씩 앉았지만 홀로 남은 돌사자는 현재 본래의 자리를 잃고 탑 앞면 가운데로 이동해 앉아 있다. 형제도 잃고, 본래 제 자리도 잃은 한 마리 외로운 ‘사자’가 형제 상봉할 그날을 그려 본다.

석가탑, 그림자가 없다?
석가탑으로 더 잘 알려진 불국사 삼층석탑.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바로 이 삼층석탑 2층에서 발견됐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폭 6.7㎝, 길이 6.2m의 두루마리로 국보 126호로 지정됐다.

석가탑에는 애틋하고도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민간설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백제 석공(石工)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다.

탑을 만들기 위해 신라로 건너간 남편 아사달은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내를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주지스님 역시 탑이 완성되기 전에 여자를 가까이 하면 부정 탈 수 있다는 생각에 남편을 찾아온 아사녀를 근처 ‘영지’라는 연못으로 보낸다. 탑이 완성되면 그 탑의 그림자가 연못 위에 비칠 것이니 그때에야 남편을 만나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는 연못에 몸을 던지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아사달 또한 아내를 뒤따라갔다는 얘기다. 기묘한 모습의 흰 탑(다보탑)이 보여 그 탑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설도 있지만 연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점만은 같다. 그래서 무영탑(無影塔) 즉 그 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천년고도 경주, 그 속에 있는 천년고찰 불국사. 그리고 그 안에 세워진 다보탑과 석가탑에 얽힌 이야기들. 그 이야기의 탄생 배경에는 탑의 뛰어난 예술성에 대한 찬미와 경외심은 물론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 그 찬란했던 시절이 부활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그리움이 녹아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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