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맹수들의 먹이가 되기 쉬운 두 마리의 톰슨가젤(Thomson’s gazelle)이 서로에게 단단히 뿔이나 죽자 사자 뿔싸움에 정신이 없다. 동물들의 천국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에 예리하게 포착된 광경이다. 그 두 마리는 일진일퇴의 치열한 각축전(角逐戰)에 몰입돼 포식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깜빡 잊었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환경에서 정신줄을 놓았으니 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 배고픈 맹수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날래고 사나운 치타가 잔뜩 몸을 낮추어 살금살금 접근하더니 전광석화처럼 그중 한 마리를 한입에 물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 뒤의 일은 물어보나 마나다. 아프리카 사바나는 동물들의 천국이지만 인간 세상처럼 지옥이 공존한다. 톰슨가젤처럼 딴 곳에 정신을 팔다 잡아먹히면 그곳은 동물에게도 천국이 아니라 지옥인 것이다.

나라 안팎의 움직임이 흉흉하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된 이후 이 세상은 어느 한 때 흉흉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연 재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되풀이 되는 인간의 사악한 행위들을 보면서 항상 ‘종말’의 공포를 안고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겉으로 엄청 개명(開明)해 보여도 덩달아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생(共生)의 지혜를 고안하고 발전시킨 것이 없다. 인간이 평화를 원하고 부르짖으면서도 살육과 파괴를 동반하는 잔인한 전쟁을 막지도 멈추지도 않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도리어 더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속은 더 검어져 흉흉한 공포가 설상가상 더욱 가중돼가는 형편이다. 따라서 아프리카 사바나가 동물들에게 천국이며 지옥이듯이 인간의 파라다이스(paradise)가 돼야 할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로 정신 줄을 놓는 순간 무엇인가에 잡아먹히는 지옥과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나라와 개인이 톰슨가젤의 꼴을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어야 하지만 우리의 대권주자들이 영락없는 톰슨가젤 같다. 긴박한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죽자 사자 대권(大權)몰이와 일진일퇴 ‘각축’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포식자를 잊은 톰슨가젤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정치권력이 혼돈 상태에 빠진 지금, 국민이 안보와 민생을 가장 걱정하고 그것을 달래고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절박함에 몰려있는 것은 상식이다. 만약 이러한 때 정치 기량이 물 찬 제비 같진 않아도 도량이 있어 보이고 육중하고 정직해보이며 균형이 잡힘으로써 그에게 믿음이 가, 마음 졸이는 국민이 그 등 뒤에서 풍설과 풍파를 피하고 싶은 그런 믿음직한 인물이 등장한다면 대세(大勢) 장악에 성공할 것만 같은데 잘못 본 것인가. 하여튼 지금의 우리 대선 판을 풍미하는 성향은 그것보다는 얄팍한 인기발언이나 약삭빠른 쇼맨십(showmanship)에 기울어져있다. 

가끔은 협량한 정치 풍토를 증거하는 코미디 같은 장면도 연출된다. 누구의 발언에 ‘분노’가 빠져있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자기의 견해만이 옳다고 싸우는 것은 협량함을 보여주는 말장난이다. 말을 엮어 나간 각각의 형식논리가 옳든 그르든 대중 정치인은 대저 분노만으로 충분한 도량을 갖추었다 할 수 없다. 거기에 사물을 선의로 보는 시각을 양수 겹장 해야 한다. 분노에 기울어 그것에 매달리면 싹 쓸고 뒤집는 혁명가이기 쉽고 선의만을 강조하면 치열한 현실 정치인이 아니라 성현(聖賢)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염려되는 것은 또 있다. 한미동맹과 대중 대북 관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시스템 배치에 대해서 지속성과 안정감을 소홀히 하는 소수 견해를 좇아 안보관이 불안해 보이며 그나마 사람에 따라 들쑥날쑥이고 언행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대선판은 아직 출전 선수들이 정비된 상황이 아니다. 이런 판국에 좀 일찍 운동장에 나와 몸을 풀었다 해서 대세를 장악했느니 뭐니 하고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누구라도 절박한 현안인 내우외환에 대한 사주(四周)경계를 소홀히 하고 국민의 불안과 고통을 무시한 채 대권몰이에만 정신이 팔려 맹수에 잡아먹힌 바보 같은 톰슨가젤의 우(愚)를 범하는 모습을 국민에 보여줘서는 최종 승리자가 되기 어렵다. 

‘인간은 시드는 풀이며 인간의 영광은 떨어지는 꽃’이라는 것은 하늘의 섭리다. 얼마나 허망한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영광인가. 권력은 그보다 더 허망한 것임에도 권력을 쥐면 영원한 우상(idol)이 되려 하고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숭배 받고 싶어 한다. 임기 없는 황제의 절대 권력도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력은 개헌이나 하면 모를까 기껏 권불오년(權不五年)의 한 ‘순간(瞬間)’이다. 그럼에도 권좌에 오르면 교만해져 실정(失政)과 일방통행의 폭주(暴走)를 삼가는 지혜가 발휘되지 않아 패가망신하는 일이 되풀이 된다. 그 권력은 동시에 머리칼 하나에 겨우 매달려 금방 떨어질 듯 머리 위에서 시퍼런 빛을 내뿜는 그리스 신화의 ‘다모클레스의 칼(Damocles’ sword)’과 같이 위험천만한 것임에도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이렇게나 바보다. 권력은 또한 경쟁자에게 잔인하다. 핏줄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된 후 뛰어난 문인인 그의 동생 조식을 죽이려 했다. 다만 일곱 걸음을 떼며 감동을 전하는 시 한 수를 지으면 살려둘 수 있다 했다. 그것이 ‘칠보시(七步詩)’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우는 구나/ 본시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거늘/ 어찌 이리 급히 삶아대는가(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자두연두기/ 두재부중읍/ 본시동근생/ 상전하태급)’. 이 시에 조비는 감동해 울면서 조식을 살려두었다. 하지만 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은 오늘날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북의 김정은에 의해 실제로 새삼 입증됐다. 그의 선친 김정일의 유언이 ‘형제를 해치지 말라’는 당부였는데도 말이다. 본래 신뢰를 두는 얘기는 아니지만 15세기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예언을 불현듯 떠오르게 한다. 오늘날의 그의 추종자들이 전하기를 그가 2017년 김정은이 권좌에서 쫓겨 러시아로 달아나 잠적하고 한반도는 통일이 된다 했다던가 뭐라 했다던가. 김정은은 몰락을 재촉했고 엄중하고 흉흉한 안보 환경이 한반도를 휘감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더욱 톰슨가젤의 싸움에나 몰두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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