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대통령이) 된다.”

15대 대선 때 이인제 후보는 이렇게 주장했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며 공격하자 이인제 후보가 이에 반격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과연 이 말은 옳은가? 지금부터 꼭 20년 전, 1997년 대선 때다. 신한국당은 이회창·이인제씨 등 ‘9룡’이 각축전을 벌였다. 이회창 후보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결정되자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해 독자후보가 됐다. 몇 차례 출렁임을 거쳤지만 당시 여론조사 결과는 DJP연합으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손을 잡은 김대중 후보가 1위였다. 다음으로 이회창 후보 2위, 이인제 후보가 3위로 나타났다. 이씨 두 사람이 단일화협상에 나서 선거 막판 회동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선거전은 끝났다. 결과론이지만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된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되고 말았다. 이회창 후보 지지자 중 상당수가 이인제 후보를 찍었고, 보수우파 표가 분열됐기 때문이었다. 김 후보가 1032만표(40.3%), 이회창 후보가 993만표(38.7%), 이인제 후보가 492만표(19.2%)를 득표했다. 1, 2위간 표차는 불과 39만표, 비율로는 불과 1.6%포인트 차이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선거였다.

지금 이 말이 실감나는 곳이 민주당이다. 역선택 가능성에 대한 뜨거운 논란과 함께 깜깜이이다. 당초 부동의 1위를 달리던 문재인 후보가 불안하다. 문 후보를 안희정, 이재명 후보가 위협적인 가속력으로 바짝 뒤쫓는 형국이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안·이 후보의 놀라운 약진은 두 후보의 개인기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중도·보수쪽 세력군의 역선택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문 후보쪽에서는 박사모와 수구정당측이 역선택을 위해 민주당 경선 참여 독려를 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안희정을 선택해서 문재인 떨어뜨리자’는 SNS가 돌고 있다고도 한다. 이런 논란은 앞으로 차례차례 경선을 실시할 타 정당에서도 여지없이 발생할 것 같다. 예컨대 앞으로 민주당쪽에서도 국민의당에서 누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게 자신들에게 유리하느냐를 판단하고 역선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선택. 이는 완전국민경선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파생된 독버섯과 같은 것이다. 원래 취지야 ‘체육관 선거’로 지칭되는 밀실정치의 관행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의 기능을 생각한다면 당원들 스스로 후보를 선출하는 게 원래 취지에 부합한다. 당원들이 후보를 선출한 다음 국민의 심판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당원이 후보를 결정하는 권한도 갖지 못한다면 무슨 존재의의가 있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민경선은 유권자 동원, 매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악의적으로 상대 정당 후보 선출을 교란하는 역선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역선택은 정당과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게 하는 제도이다.

유권자의 뜻을 직접 반영한다는 허울좋은 구호를 앞세운 정당의 국민경선은 폐지돼야 마땅하다. 대리투표가 가능한 허점이 있는 모바일투표, ARS투표, 인터넷투표 방식도 배제해야 한다. 100% 현장투표가 바람직하다. 최근 주목되는 역선택방지법안이 발의됐다. 민주당 김정우 의원(경기 군포갑)이 대표발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다. 법안은 각 정당의 국민경선을 중앙선관위 주관 하에 동일날짜에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각 정당별로 선거인 명부를 중앙선관위가 작성해 이중투표를 못하도록 하자고 하고 있다. 국민경선은 도입하지 않는 게 옳았다. 그러나 당장 코앞에 닥친 국민경선을 어찌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역선택방지를 위한 법이라도 각 정당이 서둘러 검토해야 할 것 같다.

자극적인 선동과 막말로 일관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선출한 미국 대선을 보면 지금의 대통령중심제와 대통령 선출방식만이 최선은 아닌 것 같다. 1인 1표를 바탕으로 한 대중민주정치가 갈수록 망국적인 중우정치로 바뀌고 있는 느낌이다. 과거 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 방식으로 군왕을 선출했던 신라의 화백제도가 떠오른다. 또한 중국의 철저한 당원 검증제, 주석 선출제도, 집단지도체제 방식 등도 벤치마킹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더라도 그렇다. 대통령 한 사람의 개인기에 의존하기엔 현대사회가 너무 복잡다기하고 빠른 속도로 전문화돼 가고 있다. 독일식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은 물론, 선거제도와 정치시스템의 개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큰 그림을 그려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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