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해인사 대적광전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 3대 사찰 ‘해인사’

부처 가르침 담은 법보사찰
1000년 세월 7번 화마 겪어
세계유산 팔만대장경 보관

화엄사상 담아 그린 해인도
불자들 따라 걸으며 덕 기원
대웅전 아닌 대적광전 중심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인 합천 해인사(海印寺).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통해서든 누구나 한 번쯤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한국불교 성지인 해인사는 종교를 불문하고 국내·외 단체관광객들에게도 큰 인기가 있다. 그 비결을 찾아보자.

해인사는 불(佛), 법(法), 승(僧) 불교의 삼보 가운데, 부처의 가르침인 ‘법’을 담은 법보사찰이다. 이와 더불어 불보사찰 통도사(佛寶宗刹 通度寺)와 승보사찰 송광사(僧寶宗刹 松廣寺)를 삼보사찰로 꼽는다.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국보 제32호)은 바로 이곳에 있다. 1월 초 찾을 당시 화재위험과 습도관리 등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내부 출입이 제한돼 훤히 볼 수 없었다. 대장경(불교 경전의 총서)판들이 봉안된 장경판전의 나무 창살 사이로만이 살짝 보였다. 이처럼 해인사는 대장경을 갖고 있어 예부터 ‘글이 있는 절’이라 불렸다.

▲팔만대장경을 담은 해인사 장경판전 외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장경판전의 창살 사이로 보이는 대장경판들. ⓒ천지일보(뉴스천지)

가야산 자락을 병풍 삼아 위치한 해인사에는 세계문화유산과 국보·보물 등 70여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해인사는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고, 918년 고려 태조가 국찰로 삼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10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해인사는 기록에 남은 7건 이상의 화재로 아픔을 겪었다. 창건 당시 건축 원형은 없고, 현재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말엽에 중건됐다. 이런 숱한 화재에도 화마(火魔)는 장경판전을 피해갔다. 1995년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고,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장 자승스님)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사적 제504호로 지정됐다.

‘해인사’라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붙여졌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신라시대 화엄종(중국 당나라 때 불교의 한 종파)의 기본 경전인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다. 2500년 전 석가는 깊은 바다를 두고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것이 그대로 물에 비쳐 보인다고 설명했다. 해인삼매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찰의 정문 격인 일주문(一柱門) 앞에 섰다. 이름은 홍하문(紅霞門), 일주문은 모든 중생이 성불세계로 들어서는 길의 첫 문을 상징한다. 이를 통과해야 비로소 해인사 경내는 시작된다. ‘홍하문’이라고 적힌 현판은 일주문 속에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팎으로는 각각 ‘가야산해인사’와 ‘해동제일도량’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일주문인 ‘홍하문’에서 본 ‘봉황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鳳凰門)을 거쳐 제3문인 해탈문(解脫門)까지 오는데 33개의 계단을 올랐다. 이는 삼십삼천(三十三天) 삼라만상의 우주를 뜻한다고 전해진다. 오른편에는 가야산의 산신과 토지가람신을 모시는 국사단이 있다. 국사단 앞으로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를 둘러싼 울타리에는 노란 종이에 적힌 소원들이 줄줄이 달렸다.

중심전각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인 해탈문을 지나면 구광루 앞 너른 마당이 펼쳐진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깨달음의 세계 곧 부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이다. 사찰의 구조는 보통 맨 처음 일주문에서부터 천왕문과 해탈문을 거쳐 중심전각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마당의 사람들이 바닥에 표시된 해인도를 따라 걸으며 빙빙 돌고 있다. 해인도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는 도안으로서 이를 따라 합장하고 한 바퀴 돌면 큰 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도안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온 것인데, 신라시대의 승려 의상(義湘)이 화엄사상의 요지를 시로 축약한 210자를 54각(角)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 만든 것이다. 가운데 글자인 ‘법’에서부터 왼쪽으로 돌면 바로 아래 글자인 ‘불(佛)’에 도착하게 돼 있다.

▲구광루에서 내려다 본 ‘해인도’. ⓒ천지일보(뉴스천지)

구광루를 넘어가니 중심전각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제256호)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인사에서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를 모시기 때문에 대웅전(大雄殿)이 아닌 대적광전이 중심 법당이 된다.

소원을 빌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대적광전은 웅장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다포(多包: 공포를 기둥 사이에도 배열한 것)형식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전체적으로는 정면의 주간(柱間) 크기를 비교적 크게 차지해 옆으로 퍼진 느낌을 줬다. 해인사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중삼층석탑(9세기 통일신라)과 배경삼은 대적광전이 서로 잘 어울렸다.

해인사는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과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 등을 길러냈다. 이 외에 우리에게 익숙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를 설한 퇴옹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30여년을 이곳에서 수행했다. 해인사는 그런 승려들의 혼이 서린 곳이기도 했다.

▲해인사 경내 안내도.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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