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에는 크고 작은 물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위에 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단순한 다리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수백년 된 다리는 오늘 날 온전한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우리 내 선조들의 삶 이 담겨 있었다. 이와 관련, 다리를 통해 옛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오간수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청계천 물줄기 도성 빠져나간 수문
아치형에 다섯 칸의 수문으로 구성


도성 안 죄 지은 자 빠져나가거나
밤에 도성 안 잠입하는 통로로 이용
1907년 헐린 후 2004년 복원돼

조선시대 준설 찬양 시인 ‘준천가’
오간수교 아래에 새겨 넣기도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종로구 동대문역에서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쪽으로 가다보면 청계천에 특별한 곳이 있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이다. 동대문을 많이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지나쳤을 법한 오간수문. 하지만 이곳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눈길도 주지 않고 오간수문 옆을 휙 지나가기 때문.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오간수문이란

오간수문은 조선시대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놓인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다섯 칸의 수문으로 이뤄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수문의 모양은 아치형으로 돼 있다. 이곳은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성종 12년(1481년)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는데,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됐다고 한다.

▲ 재현해 놓은 오간수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오늘날 동대문에서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인 ‘오간수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왼쪽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것이 있다. 원래 오간수교 자리에 오간수문이 있었다. 없어진 오간수문 자리에 다리를 놓아 이곳을 오간수교라 한 것이다. 하지만 오간수교 글자는 한글로만 적혀 있다. ‘五間水橋(오간수교)’라고 한자를 함께 적어야 그나마 제 뜻을 알거 같았는데, 그러지 못해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다리도 그러한데, 오간수문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는 건 오죽하겠나 싶었다.

◆임꺽정 도망간 오간수문

본래 수문은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고 수문마다 쇠창살로 철문을 설치했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오간수문은 조선시대에 도성 안에서 죄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통로로 곧잘 이용됐다.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도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

▲ 오간수교 아래에 있는 오간수문의 옛 사진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

오간수문은 언제 사라졌을까. 이 또한 일제 시대였다. 1907년 일제는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이유로 오간수문을 헐었다. 이후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했다가 후에 그 위의 성곽이 훼손되면서 함께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 청계천 복원사업 일환으로 오간수문 아래 끝받침에서 홍예(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되면서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 오간수교 아래에 있는 준천가 ⓒ천지일보(뉴스천지)

◆오간수교 아래 준천교와 준천가

현재 오간수교 아래에는 특별한 것이 남아 있었다. 우선 ‘준천가(濬川歌)’가 있다. 준천가는 채제공이 영조 때인 1773년 청계천 석축 공사 완공 현장에서 영조에게 바친 시다. 이 시는 일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청계천준설 공사를 단행한 영조를 칭송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준천가는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오간수교다리 아래 북벽에 검정 대리석 위에 각자해 설치해 놓았다.

준천가 벽화 건너편에는 조선시대 그림인 ‘준천도’가 있다. 준천도는 1760년 4월 영조가 오간수문위에 친히 나아가 개천 준설 역사를 지켜보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또 1900년쯤 찍은 오간수문 사진을 도자에 전사한 그림 등이 복원돼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옛 모습의 오간수문을 이렇게라도 사진을 통해 흔적을 남겨 놓은 듯 했다.하지만 아쉬움이 더 컸다. 다리 밑으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역사적 자료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기자 또한 그랬다. 왜 이제야 이곳을 발견한 걸까. 이곳은 아는 사람만 아는 공간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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