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호(號), 지금 대한민국호는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의 침몰위기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배의 키를 잡은 절대 권력의 키잡이가 실종된 상황, 틈을 타 선원 중에는 서로 자신이 키잡이가 돼야 한다며 선객들을 향한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침몰위기의 상황에서도 선객들은 극단적 호객행위로 인해 혼란은 더욱 더 가중돼 가고 있다. 선원들은 어떻게 하면 침몰위기의 배를 수습해 배와 선객들을 안전하게 항구에 정착시킬지에 대해 지혜를 모으고 고민하는 이들은 없어 보인다. 오직 자신과 정파가 정권을 잡느냐 못 잡느냐가 전부며, 일부 길들여진 추종세력 또한 일반이다. 무자비할 정도로 그들에겐 나라와 국민은 없다.

이쯤에서 한번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보자. 8.15 광복 후 하나의 대한민국이 되지 못한 이유가 뭘까.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은 남과 북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신탁통치 여부를 두고 국내 정치세력은 분열과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가운데, 우익은 즉각적 반탁을 표명했고, 좌익은 초기의 반탁에서 신탁통치를 통해 사회주의적 국가 수립이 가능하다는 계산 하에 친탁으로 방향이 급선회 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반탁과 친탁의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까지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시대는 달라도 그 때나 오늘이나 우리의 고질적 의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반탁과 친탁’ 대신 ‘탄핵과 탄핵 반대’의 회오리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국제 상황과 예측불허의 한반도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의식과 가치관 나아가 정책은 실종된 채, 자신의 욕심과 지역과 정당의 이익만을 앞세운 표심잡기 내지 인기병합이라는 낡은 가치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소인배들의 불장난에 국민들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우롱당하며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를 만난 대한민국호, 지금의 이 난파된 배를 정비해 끌고 갈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의 덕목은 과연 뭔가. 그것은 나라와 국민만을 염려하는 애국적 마인드, 국제적이면서도 현실적 감각, 이치적이며 합리적인 사고, 감성이 아닌 이성적 사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이어진 구국의 정신을 소유한 자라 할 것이다.

지난 11일 자유한국당(구 새누리당) 원유철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민국이 두 동강이 나고 있다”면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촛불이든 태극기 집회든 정치권의 장외 집회 참석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어서 “‘여야정치대협상회의’를 열어 대타협을 이루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의도가 어디에 있든 그 발언 자체만큼은 시기적으로 적절하고 귀 기울일 만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바람 잘 날 없이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새삼 오버랩 되지 않는가. 밤낮 없이 이어온 정파 싸움,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현실 앞에서도 하나 되지 못했던 지난 역사는 이 순간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지금은 자신보다도 지역보다도 정당보다도 나라와 국민이다. 지도자는 말 그대로 지도자가 돼야 하고, 선동가가 돼선 안 된다. ‘최고의 폭력은 차별’이라는 말처럼, 편견과 선입견이 이 나라와 국민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시 둘로 갈라놓으며 파국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여기에 정치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백성들은 좋게 여기며 장단을 맞추고 있다. 집회 참석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선동하는 선동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식과 행동은 비겁하고 야만적이며 매국적 행위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참다운 지도자라면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오직 나라와 국민의 편에 서야 하고 정의와 순리의 편에 서야 하고 화합과 통일의 편에 서야만 한다. 나아가 국민 앞에 정책과 비전과 희망과 미래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면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음을 받아 왔다. 공자는 이 군자(君子)에 대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像)이라 했다. 먼저 군자는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알기에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다. 지도자로서 그에게는 백성이 곧 하늘이다. 이러한 군자에 대해 공자는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다시 말했으니 곧 ‘군자삼면(君子三面)’이다. 우선 군자는 위엄이 있어야 하며, 그 위엄 속에는 인애와 온유함과 긍휼함이 있어야 하며, 나아가 지혜 곧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로 설득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누구나 갈 수는 있지만 아무나 도달하기 힘든 길, 그 좁고 협착한 길을 늘 자신과 싸워 이겨내며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본다면, 어느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군자와 같은 지도자를 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굳이 명하지 않아도 그 행하는 것만 보고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 그렇기에 군자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자신을 가장하거나 꾸미지 않아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도 했는데, 이러한 군자삼면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늘도 추운 겨울을 이기고 온 목련화같이,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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