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선비들의 패션 아이템인 갓(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상투 착용, 성인 인증하는 것
젊어 보이기 위해 망건 졸라 매

조선 후기엔 ‘갓 테’ 점점 커져
법 무시하고 고가 갓끈 착용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색색의 도포자락에 검은 갓을 쓴 사대부 남성들.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신분과 격식에 맞는 옷차림이 중요했다. 그런데 사대부 남성들도 패션을 중요시 했으니, 그 완성에는 ‘갓’이 있었다. 사대부 남성들은 어떻게 갓을 착용했을까.

상투 튼 남성, 어려도 존경·의무 부여

갓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상투’를 틀어야 했다. 상투는 머리카락을 모두 올려 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맨 머리 모양이다. 남자가 성인이 됐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비록 나이가 어려도 상투를 틀면 남성으로서 존경과 의무를 부여 받았다. 상투를 틀지 않고는 공직에 오를 수 없을 정도였다.

상투를 트는 데는 규격이 있었다. 1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자료에 따르면, 카르네프는 상투 크기를 길이는 2~3인치(5~8㎝), 두께는 1인치(2.5㎝)로 수직이 되게 들어서 감아 맨다고 했다.

조선에서 33년을 보낸 언더우드도 “소녀의 머리처럼 갈래로 땋아서 등에 길게 드리웠던 머리카락을 전통적인 형태로 빗질해 머리를 푼 다음 가마를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면도를 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질해 위로 올려 면도 된 지점 위로 단단하게 묶되 크기는 높이 2~3인치(5~8㎝), 직경 1인치(2.5㎝)가 되도록 한다”고 말했다.

▲ 갓을 쓰기전에 머리에 둘렀던 망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날 정도로 망건 두르기

상투를 튼 후 머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해 머리띠인 ‘망건’을 둘렀다. 이마의 중간쯤까지 내려서 머리 둘레에 동인 다음 관자에 건 후 다시 상투에서 마무리해 고정시켰다. 이때 망건을 이마에 바짝 밀착시키면 머리카락과 이마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유행에 민감했던 사대부들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망건을 졸라맸다. 이 경우 이마에 상처가 나거나 헐었다. 망건을 풀고 나면 이마가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왜 망건을 졸라맸을까. 앞이마가 약간 솟기도 하고 눈썹이 살짝 올라가기도 해 얼굴 표정이 전체적으로 긴장되고 의욕적으로 보여 젊어 보이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 망건을 벗을 때 당줄을 풀지 않고도 위로 잡아 올리면 한 번에 망건이 벗겨졌다. 이때, 앞이마 쪽으로 난 털이 빠지기도 했다.

세속에서는 머리털이 일찍 벗겨지면 출세하는 상으로 여겨 족집게로 뽑았다고 한다. 결국 출세를 바라던 사대부 남성들의 심리가 담겨있던 건 아닐까.

◆갓은 살짝 걸쳐야 제 맛

패션의 완성은 역시 갓이었다. 갓은 사대부 남성들이 외출할 때 착용했던 대표적인 모자다. 갓은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帽子),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뤄졌다.

갓은 어떻게 착용했을까. 조선후기 유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를 통해 ‘갓을 뒤쳐 쓰지도 말고 끈을 움켜잡아 매지도 말고, 귀에 내려오게 매지도 말라’고 했다. 갓의 착용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갓은 조선시대 중요한 복식의 일부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윗부분인 모정이 좁아져 머리에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가 됐다. 머리에 갓을 눌러 쓰는 게 아니라 얹어야 했던 것. 이때 사대부들은 갓으로 멋을 표현하기 위해 갓끈을 붙잡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 후대로 갈수록 테의 크기가 점점 커져 사치스러움으로 지정됐다. ‘갓끈’의 치장도 상당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위에 따른 갓끈 치장을 규정해 놓았다. 당상관 이상만 갓끈에 금옥을 쓸 수 있었고, 당하관 이하는 마노, 호박, 산호, 청금석 등을 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일반 사대부들은 갓끈을 상아영, 마노영, 죽영 등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길이도 가슴까지 늘어지도록 했다. 멋 부리고자 하는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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