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에는 크고 작은 물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위에 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단순한 다리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수백년 된 다리는 오늘 날 온전한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우리 내 선조들의 삶 이 담겨 있었다. 이와 관련, 다리를 통해 옛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 ①도심 빌딩과 공존하고 있는 조선 첫 도성안 돌다리 ‘광통교’ ⓒ천지일보(뉴스천지)

공 세운 이방원, 세자책봉 밀려
신덕왕후 아들 세자로 책봉돼

태종, ‘왕자의 난’으로 정적
숙청신덕왕후 묘 사대문 밖으로

묘소 석물 뜯어다 다리 부재로
백성 다니게 해 철저히 복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무늬가 뒤집힌 거 아닌가?’

서울 종로구 청계천 다리인 ‘광통교(廣通橋)’를 무심코 지나갔다면 교대석(다리 끝 받침돌)을 보고 이런 의문이 들 거다. 하지만, 교대석이 거꾸로 된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 광통교는 어떤 다리였고,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한양 천도 후 만들어진 돌다리
광통교는 이성계의 한양 천도 후 가장 이른 시기에 설치한 석교였다. 현재 서울종로네거리에서 을지로네거리 방향으로 나가다 보면 광통교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렀으며, 다리 아래에는 청계천이 흘렀다.

8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06년(태종 6) 잦은 수해를 막기 위해 청계천을 개조하고 정비했지만 홍수는 끊이지 않았다. 원래 광통교는 토교(土橋)였는데, 홍수 때 익사자가 많았다. 이에 1410년(태종10)에 의정부에서 다리를 석교(石橋)로 개축할 것을 아뢴다. 왕은 이를 허락했고, 광통교는 도성 안에서 처음으로 돌다리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후 이 다리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의 한을 달래는 다리가 되기도 했다. 청계천 상류에 있던 광통교. 개천 폭이 크지 않아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도성의 중심지로 운종가(현 종로)와 가까워 많은 사람이 이 다리를 왕래했다.

시전인 운종가에는 면포전, 어물전, 생선전, 면주전 등 각종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시전 뒤로는 생산의 배후지로서 수공업 작업장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통교는 도성 중심 다리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 광통교 아래에 신덕왕후 묘소에서 가져온 석물이 뒤집힌 모양으로 남아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부친 이성계 계비 묘소 석물 뜯어

겉모습만 보면 쉽게 알 수 없지만, 광통교에는 엄청난 비밀이 담겨있다. 무덤의 돌을 뜯어다가 다리를 만든 것. 태종은 주변의 하고 많은 석재를 제쳐두고, 부친인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 묘소의 석물을 뜯어 다리 부재로 사용했다.

사연은 이렇다. 조선 초, 태조는 세자책봉 문제로 조정의 대립을 극대화했다.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왕자인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길 바랐다. 하지만 강씨는 자기 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추대했고, 결국 책봉됐다. 이방석은 이방원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이후 이방원에 의해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은 정적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마침내 자신을 소외시킨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숙청한다.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미 숨을 거둔 신덕왕후의 묘 정릉을 사대문 밖으로 옮겼다. 또 정릉에 있던 병풍석을 모두 뜯어 청계천으로 가져와 다리로 만든다. 공사 도중 교대석이 거꾸로 된 것을 발견했지만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정릉은 다른 능과 달리, 지금까지도 병풍석이 없는 능으로 남게 됐다. 거기다 도성 모든 사람이 광통교를 밟고 다니니, 신덕왕후를 철저하게 능멸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 해의 액운을 없게 해준다는 ‘다리밟기’ 놀이도 광통교에서 열렸다.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야간에 주로 하는 다리밟기는 신분 구별 없이 누구나 참여했다. 문헌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 행렬이 이어졌으며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놀이할 때는 야간 통금도 늦췄다고 한다.

▲ 광통교 아래에 ‘경진지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영조 대 준설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천지일보(뉴스천지)

◆2003년 광통교 복원… 권력투쟁의 흔적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광통교는 1910년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면서 다리 본체가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히게 됐다. 해방 후인 1958∼1961년에는 암거공사(暗渠工事)로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다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다 2003년 7월 청계천복원사업이 시작되는데, 이때 광통교가 새롭게 놓이게 된다.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광통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쯤의 위치에 다리는 복원됐다. 현재 광통교에는 신덕왕후 강씨 묘소에서 뜯어온 석물이 남아있다. 권력을 탐했던 권세가들의 야망과 한, 그 마지막 모습은 가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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