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7년 루터가 내건 95개조 반박문이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고, 가톨릭 교황과 독일 황제가 루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520년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지만 오히려 루터는 그 파문장을 태워버렸다. 이후 루터는 계속 도망 다니게 된다. 이듬해 루터는 황제인 카를 5세의 면전에서도 자신의 신앙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결국 보름스 칙령에 의해 제국 추방 처분형을 받았다. 사진의 예술품은 루터의 활동을 묘사한 작품으로 비텐베르크의 루터하우스 내 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사진과 함께 보는 ‘루터의 도시’

독일 정신사 속 가장 중요한 장소
프로테스탄트 신앙인들의 순례지
종교개혁 유산 찾는 발길 이어져

95개조 반박문 새겨진 슐로스교회
실제 루터가 살았던 집 ‘루터하우스’
세계 중 가장 큰 종교개혁사 박물관

[천지일보= 독일 우수연 특파원, 강수경 기자] ‘루터의 도시’라 불리는 독일 중동부 작센안할트 주의 비텐베르크는 프로테스탄트의 순례지이자 종교개혁의 성지다. 루터의 종교개혁 진원지인 이곳은 인구 5만여명의 작은 도시지만 독일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도 꼽힌다. 비텐베르크는 오늘날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유산들이 많이 있다.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의 부패성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이곳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슐로스교회) 문에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반박문이 공적인 게시물이었는지는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지만 당대 큰 파장을 일으킨 것만큼은 명백하다. 지금 이교회의 측면 철문에는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져 있다. 이 교회에는 루터의 무덤이 있기도 해 세계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루터가 전에 살았던 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개혁사 박물관이 됐다. 당초 수도원이었던 건물이었던 이곳은 루터의 종교개혁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그림, 책, 유물 등 각종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록돼 있다.

이 외에도 비텐베르크에는 루터가 여러 차례 설교를 했던 슈타트키르헤, 종교개혁 시대 인쇄물과 손글씨 원고 수백점이 소장된 데사우-로슬라우의 퓌어스트 게오르그 도서관이 있다. 이 곳에는 세 권으로 된 크라나흐 성경이 있는데 그 안에 루터, 멜란히톤을 포함하여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친필 메모가 들어 있다.

▲ 원래 수도원이었다가 루터가 살게 된 집이었던 ‘루터하우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루터가 살던 집을 개조해 박물관 및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루터하우스’ 외벽에 루터의 얼굴 부조가 설치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종교개혁을 부른 중세교회와 사회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그의 95개조 반박문에 자세히 나온다.

배경이 된 중세사회는 신앙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열망은 높아졌지만, 답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관광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483년부터 1546년까지는 중세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신앙인들은 경건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했다. 반면 중세 말엽에는 악마, 마귀, 악몽 등에 시달렸고 두려움과 걱정이 당시 신앙인들을 지배했다. 전염병과 자연 재앙은 신앙인들에게 세상의 멸망이 다가왔다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특히 1520년 슐레이만 대제가 터키군을 이끌고 빈을 포위했을 때 신앙인들은 멸망이 왔다고도 느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 시대는 경제 문화 학문의 중흥기가 됐다. 발명가, 탐험가, 정복자들은 미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더 커진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봤다. 지리학, 지도 제작술, 항해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당시 탐험 여행이 가능했다. 값비싼 물건들이 무역 루트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고, 상업을 특징으로 하는 시민 사회의 부가 축적됐다.

▲ 루터하우스 내부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종교개혁과 관련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말과 행동 다른 성직자에 대한 반기

루터의 종교개혁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1436년 구텐베르크는 인쇄기를 발명했고, 루터는 “인쇄된 언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의 중심에 개인인 인간을 뒀고, 티치안 다빈치 브뤼겔 뒤러와 같은 화가들은 고대 문화를 지향하며 인간과 주변 환경을 실물에 가깝게 묘사하려 했다. 이 시기에 최초의 주머니 시계가 탄생했고, 아직 루터가 살아 있던 1543년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며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대 관념이었던 천동설을 믿었던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전체 천문학을 뒤집으려는 얼간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 당시 기독교계에서는 추기경, 주교, 사제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 성직자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516년 동시대를 살았던 한 기록자의 글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주둥이를 막아줄 의로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이후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반박문 논제를 걸기까지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 루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비텐베르크 마르크트 광장의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슐로스교회)의 철문에는 현재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95개조 반박문에는 어떤 내용이?

루터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해명하려는 열정을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신부이며, 인문학부 및 신학부 교수 겸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논쟁하고자 한다”며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토론을 제안했다. 그는 말로 논할 수 없는 사람은 글로 토론을 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그 일부를 살펴보면 ▲예수가 외친 ‘회개하라’의 의미는 신자들의 전 생애를 참회하는 것이 돼야 함 ▲‘회개’가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고해성사)는 아님 ▲내적인 회개를 해도 육신의 정욕 등 억제가 되지 않으면 무의미함 ▲내적 참회의 형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됨 ▲교황은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 용서할 힘이나 뜻을 갖지 못함 ▲교황이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은 없음 ▲사제의 권력에 복종하면서도 다른 모든 일에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는 죄 있음 등이다.

이는 당대 로마 교황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은 면죄부 사면 자신의 지은 죄가 해결된다면서 신앙인들을 속이고, 장사치로 전락한 당시 가톨릭에 회개를 외친 목소리였다.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독일 곳곳은 기념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비텐베르크 도시 상점에 루터 캐릭터가 그려진 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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