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자유언론’의 천국으로 말한다면 미국을 뺄 수는 없다. 그 미국에서 뜬금없이 직설가이며 다변가인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 제기된 ‘가짜뉴스(fake news)’ 공방이 뜨겁다. CNN방송과 뉴욕타임스는 세계 최대의 시청자를 자랑하거나 외부 압력에 휘둘리지 않는 정론지로서의 명성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견해는 다르며 혹독하다. 트럼프는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 매체들의 뉴스가 ‘가짜뉴스’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한다. 그것은 노골적이며 지속적이다. 이래서 화약 냄새는 없으되 대통령과 언론 매체 사이에 벌어진 영락없는 전쟁이다. 누가 이길까.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을 가릴 것 없이 자신에 대해 날아오는 칭찬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반대로 트럼프의 경우가 새삼 입증하듯이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에 불쾌해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트럼프를 섭섭하게 한 매체는 CNN과 뉴욕타임스뿐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정치 아웃사이더며 정치 초심자였다. 마치 그렇다 해서 그를 깔보듯이 다른 후보에 비해 유독 돋보이게 트럼프를 깔아뭉갠 매체들이 그들 말고도 많았었다. 선거가 끝나고서도 대개는 잠시 관행처럼 있게 마련인 언론이나 정적(政敵)들과의 이른바 ‘밀월(honeymoon)’도 트럼프는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가 집권 초반 발휘하는 실험적이고 공격적이며 저돌적인 의욕이 각계각층과 불화를 낳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을 비롯해 대통령이 실직적인 권력을 갖는 모든 나라의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 그 자체다. 그 같은 미국 대통령과 언론매체가 벌이는 싸움의 승자를 논(論)한다는 건 좀 유치하지만 그렇다고 언론 매체들이 그 싸움을 감당하기 버겁다고 느껴 얼른 꼬리를 내릴 것 같지도 않다. 적어도 가능한 짐작은 어느 쪽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愚)를 범하는 쪽이 멋쩍은 패색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 싸움은 실정법이 아니라 ‘여론의 법정’에서 시시비비에 대한 판정이 내려질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주의 체제의 차별화되는 속성은 궁극적인 시시비비와 잘잘못이 ‘살아있는 권력’이나 언론의 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체제에 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만큼 ‘여론의 저울추’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권력과 자유 언론이 드잡이 하는 정도는 돼야 진정한 언론이 존재하는 나라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의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어디다 ‘언론’이라는 명함조차 꺼낼 형편이 못 된다. 그들은 일당 독재의 통제에 따라 그 체제의 의중과 발표만을 기록하고 발표하는 녹음기이며 확성기에 불과하다. 언론 종사자들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활동하는 자율적 공인(公人)으로서의 언론인이 아니다. 그저 일당 독재 체제의 참여자이며 동시에 그 체제에 꼬리를 흔드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언감생심 대통령인 트럼프에게까지 가차 없는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미국의 언론에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근처에조차 접근할 엄두를 낼 수 없다. 개혁 개방이 그들의 경제를 관치(官治)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은 아니로되 급속히 도약시킨 것은 틀림없으나 언론은 여전히 구(舊) 통제 시대의 숨통 조인 상태 그대로다. 트럼프가 말한 ‘가짜뉴스’는 그런 통제 언론에서 양산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 언론이 그 같은 통제와 예속을 벗어날 날은 언제일런가.  

이런 암울한 형편에 중국 언론 매체의 중심인 관영 신화통신이 최근 취급한 한국 관련 보도는  너무나 모멸적이고 어처구니없었다. 한편으론 가소(可笑)롭기 짝이 없었다. 신화통신은 트럼프 정부의 국방장관 매티스가 장관 취임한 후 첫 방문국으로 한국을 다녀간 것과 관련 ‘한국은 미국의 바둑알로 전락했다’며 ‘두고두고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협박을 늘어놓았다. 이런 협박은 한미 동맹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시스템 배치에 대한 그들의 계속되는 반대와 별개가 아니며 중국 권력 핵심의 음흉한 진짜 속마음을 담고 있다. 중국 매체들은 이렇게 권력 핵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앵무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꼭두각시 매체에 불과한 제 분수도 모르고 우리에게 퍼부은 ‘모멸’은 우리가 받아 안을 몫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가 그들의 심장에 아프게 꽂힐 그들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엿한 주권국가다. 그것도 그들의 것보다 훨씬 더 인권적 가치와 보편성을 인정받는 자유민주 체제의 주권재민(主權在民) 국가다. 안보 측면에서 미국에 의존하는 점은 있으나 그렇다고 한미 동맹이 우리를 억압하거나 예속하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안보의 대세와 추세는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도 동맹에 의존한다. 하물며 힘 약한 국가가 자국에 안전한 파트너를 골라 동맹관계를 갖는 것은 더더욱 떳떳하다. 그럼에도 중국은 관영 매체를 동원해 우리를 미국의 바둑알이라 모독했다. 이웃 국가를 바라보는 그들의 내밀한 관점이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이 참으로 이웃에 결코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미국의 바둑알이라고 하는 그 같은 관점과 발상, 그리고 건전하지 않은 근성을 발휘하는 것으로 본다면 저들은 필시 우리를 저들의 장기알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모욕이다. 저들은 잊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저들의 경제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경제대국이 된 지금 저들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북핵(核) 문제 해결과 우리의 안보에 성의를 다하기보다 ‘사드’ 배치를 트집 잡아 몽니 부리기에 바쁘다. 우리 주권 사항인 사드를 배치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대들 중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없애고 우리의 안보를 책임질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드배치에 시비할 자격도 권리도 없다. 

어쨌든 강대국의 오만이 작용하는 중국의 외교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 같은 외교는 선린관계를 해치며 우리를 그들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동시에 새삼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 동맹의 중요성을 음미하게 된다. 중국은 이걸 원하는가. 그렇다고 그들 외교에 사대(事大)의 ‘조공(朝貢)’을 바치듯이 어줍은 충고를 바칠 생각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포식자의 사냥 몰이와 조선말의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을 떠올려 우리의 경계(警戒)로 삼고 싶을 뿐이다. 뭔가. 저런 오만 불손한 강대국의 원심력에 우리가 휘둘리거나 겁먹거나 4분 5열 됐을 때 나라의 명줄 보존이 어려웠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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