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한울로 무극대도 받은 곳
천도교 최고의 성지로 꼽혀
영정, 직접 쓴 ‘龜’자 걸려
소실됐던 생가 최근 복원

세상 구할 진리 찾던 최제우
용담정서 동학 창시했지만
이단으로 몰려 사형 당해

▲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태어나고 공부해 깨우쳤다는 ‘용담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차은경 기자] 조선 후기 모든 사람은 다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동학. 신분제가 자리 잡고 있었던 조선 시대 말기 동학은 농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대거 봉기한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이 되기도 했다. 천도교로 발전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태어나고 공부해 깨우친 곳이 바로 구미산(龜尾山) 자락에 위치한 ‘용담정(龍潭亭)’이다. 구미산은 거북 구(龜)와 꼬리 미(尾)를 합해서 ‘거북의 꼬리’라는 뜻으로 ‘꼬리 끝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용담정에는 천도교인이 아니더라도 동학을 알고자하거나 용담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가을의 용담정은 맑은 계곡과 흩날리는 단풍이 어우러져 해마다 많은 방문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바람이 코끝을 시리는 1월 중순 동학의 창설지이자 천도교의 성지인 용담정을 찾았다. 경주 현곡면 금장리에서 영천 쪽으로 빠지는 925번 지방도로를 타고 약 5.7㎞를 가면 구미산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산 계곡에 용담정이 있다. 구미산과 용담계곡 일대 약 40만평에 이르는 용담성지 경내에는 용담정, 사각정, 성화문, 대신사동상 등이 있으며 용담정, 용담수도원, 포덕문, 성화문 등의 현판 글씨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고요한 구미산 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따라 올라갔다. 길의 끝에 네 개의 백색 기둥이 하늘로 솟아 있는 문이 보인다. 수운 최제우가 깨우침을 얻었다는 곳, 용담정으로 가는 첫 문이다. 포덕문(布德門)이라 적혀 있다. 덕을 세상에 펴는 문이라는 뜻이다. 포덕문 계단 아래에는 ‘聖地(성지)’라 새겨진 작은 바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바로 천도교의 성지다.

▲ 대신사수운최제우상. 왼손에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포덕문을 지나면 커다란 정원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대신사수운최제우상(大神師水雲崔濟愚像)’이다. 왼손에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왼손에 독립선언문을, 오른손은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인내천 사상과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자유, 박애, 평등이 맞닿아 있다.

정원을 거쳐 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올라가다 보면 성화문(聖化門)에 도착하게 된다. 왼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름이 용담(龍潭)이다. 성화문을 지나면 포장되지 않은 산길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계곡이 흐르는데,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길을 용담보계(龍潭寶溪)라 한다.

▲ 용담정 내부. 수운 최제우의 영정과 직접 쓴 거북 구(龜)자가 걸려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어두운 숲길을 10여분쯤 오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용담교 너머로 팔작지붕의 용담정이 보인다. 용담정은 상당기간 방치되다 구미산 일대가 경주국립공원에 1974년 편입되면서 1975년에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안에는 수운 최제우의 영정과 직접 쓴 거북 구(龜)자가 걸려 있다. 용담정 위쪽 계류 앞에는 작은 사각정이 자리한다. 용추각(龍湫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는 최제우 선생의 부친인 근암 최옥 선생의 문집 목판본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용담정의 끝단까지 올라가면 작은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사각정 옆을 흐르는 계류가 용담정 옆에서 폭포로 변신한 것인데, 이는 용담정의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 중 하나라고 한다. 폭포를 이룬 계류는 작은 다리를 거쳐 용담정 앞을 지나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간다.

▲ 용담정 위쪽 계류 앞에 자리한 용추각. 내부에는 최제우의 부친인 최옥 선생의 문집 목판본이 보관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용담정 주차장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수운 최제우의 생가가 있다. 생가는 최제우가 젊을 때 불에 타서 소실됐지만 최근에 다시 복원했다. 마당에는 1971년에 세운 귀부와 이수를 갖춘 높이 5m의 유허비가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 사랑채가 보인다. 문을 열어둬 내부를 볼 수 있게 했다. 맞은편 산중턱에 그의 묘가 있으며, 묘의 왼쪽 산골짜기에 용담정이 있다. 이 세 곳이 모두 1㎞ 이내의 거리에 있다.

▲ 수운 최제우 생가. 최제우가 젊을 때 소실됐지만 최근 복원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용담정은 도학으로 이름 높았던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이 나이 6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구미산 계곡에서 시를 읊조리며 소일하던 곳이다. 최옥은 나이 63세가 되던 해 한씨를 세번째 부인으로 맞아 1824년 10월 28일 최제우를 낳았다. 그가 태어나던 날 구미산이 사흘 동안 크게 진동했다고 한다.

용담에서 난 최제우는 장년이 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도(道)를 찾고자 1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금강산을 비롯해 명산대찰을 찾아 고승과 담론을 하는 등 세상을 건질 진리를 찾아 헤맸으나 가산만 탕진하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용담정으로 돌아왔다. 최제우는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네 글자를 문 위에 써 붙이고 ‘여기서 도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했다. 수도에 전념한 지 6개월 만에 그는 ‘한울님이 사람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를 깨닫게 된다. 그날이 바로 수운 대신사가 무극대도(하느님의 가르침)를 받은 1860년 4월 5일이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이를 ‘이단지도(異端之道)’라 하며 ‘좌도난정(左道難正: 유교(儒敎)의 가르침과 법도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통해 백성들을 현혹시키거나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함)’의 죄명으로 그를 참형에 처했다.

이와 같이 한울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은 장소인 ‘용담정’을 천도교에서는 최고의 성지로 꼽고 있다. 그러나 역적의 연고지로 지명된 이곳은 상당기간 황폐하게 방치돼 왔다. 수운 최제우의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거둬 구미산 기슭에 안장한 이후 중건과 퇴락을 거듭하던 용담정은 1974년 경주국립공원에 편입됐다. 그러면서 천도교인들이 성금을 모아 1975년 10월, 오늘의 모습을 갖춘 용담정을 준공했고, 성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됐다.

◆수운 최제우는?

▲ 수운 최제우.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儒)·불(佛)·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해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경주 출신의 최제우는 부친 최옥과 모친인 과부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전해지는 최제우는 어린 시절부터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했으나, 17살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세가 궁핍해져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유랑 생활 동안 최제우는 장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술이나 점복술을 접했다. 이때 최제우는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고자 무술을 익혀 무과에 응시하려고 생각했다고도 한다. 고뇌와 방랑의 시기를 경험한 최제우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의 혼란한 대내외적인 정세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한울의 뜻이라 생각하고는 구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1859년 즈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고쳤다. 고향 인근의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을 지속하던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한울의 계시를 듣고 득도하게 된다. 이 시점을 동학(후일의 천도교)에서는 포덕 원년이라 칭한다. 최제우는 득도 이후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또한 동학의 이론화 작업에도 착수해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만들었다. 한문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동경대전은 지식인층을 위한 경전이고, 가사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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