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에는 크고 작은 물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위에 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단순한 다리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수백년 된 다리는 오늘 날 온전한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우리 내 선조들의 삶 이 담겨 있었다. 이와 관련, 다리를 통해 옛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입구 개천 위에 놓여 있는 수표교를 한 시민이 걷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하수시설 부족해 홍수피해 커
청계천 개설 후 다리 만들어

경진년, 개천 준설사업 실시
‘경진지평’ 글씨 다리에 새겨

청계천 복개공사 후 자리 잃어
수표석은 세종대왕기념관에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입구 개천 위에 놓여 있는 돌다리 하나. 바로 ‘수표교(水標橋)’다.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인 이 다리는 조선시대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해 홍수를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수표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양 천도 후 청계천 건설

수표교는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시기반시설을 위한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조선 초 한양은 하수시설 미비로 장마 때마다 홍수 피해를 입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04년 7월 개성에 홍수가 나서 시내의 수위가 10여척이나 됐다. 풍반교 수문이 파괴돼 성벽이 무너졌고, 100여채의 가옥이 떠내려가거나 파괴됐다. 12명의 사람과 40여필의 말이 익사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 같은 피해를 막기 위해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에 걸쳐 한양의중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천(開川, 청계천)을 개설했다. 그리고 백악·인왕·남산 등 주변 물길을 한 곳으로 모아 동대문 밖으로 흐르도록 했다. 개천 건설로 한양은 물이 범람해 발생하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수표교는 이때 만들어진 청계천 위에 세워진 다리 중 하나였다.

▲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해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만든 수표교 ⓒ천지일보(뉴스천지)

◆원래 이름은 ‘마전교’

처음부터 이름이 수표교였던 건 아니다. 수표교가 세워질 당시 주변에 소나 말을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렸다. 세종 23년(1441년)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 물높이를 재 홍수를 대비하도록 했다.

개천의 다리는 조선 초에 토교(土橋)나 목교(木橋)로 지었다. 하지만 태종 연간부터석교(石橋)로 교체했는데, 수표교도 태종 대부터 세종 재위 기간에 돌로 개조했다. 하지만 300년의 세월이 흐른 영조 대에 개천은 자연 재해와 유지 관리부족으로 장마철에 홍수 피해가 발생했다.

개천의 범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진년(1760년, 영조 36년)에 영조는 대대적인 개천 준설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개천의 바닥을 파내고 다리를 보수하는 데 많은 인력이 동원됐다. 이때 준설사업의 본보기를 삼기 위해 수표교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坪)’이라는 글씨를 새겨두고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했다. 다리 자체가 수량을 재는 도구로 발전한 것. 이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났다.

수표교는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을 깔아 만들었다.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 2단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해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했다.

난간에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 당시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築(정해개축)’ ‘營改造(영개조)’ 등 개축한 해를 표시한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이는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됐음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 다리에는 ‘丁亥改築(정해개축)’ ‘營改造(영개조)’ 등 개축한 해를 표시한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수표교 위에서 즐기는 민속놀이

정월 대보름 즈음에 수표교 위에서 여러가지 민속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연날리기’가 있다. 연날리기는 정월 열사흗날과 열나흗날 주로 날렸는데, 연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다리밟기’도 진풍경을 이뤘다. 중종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따르면, 양반집 부녀자들은 가마를 타고 지나다니고, 여염집 처녀들도 서로 짝을 지어 앞다퉈 어둠 속에서 다리밟기를 했다.

중종 말년부터 도성 안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열두 다리를 지나다니면 그해 열두 달의 재수를 좋게 한다고 했기 때문.

무뢰배들이 떼를 지어 여자들을 따라다니는 등 추잡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명종 때 사헌부 관원들이 이런 무리를 잡아 죄를 다스리고 난 후부터 부녀자들의 다리밟기 풍습이 저절로 없어졌다. 그래도 남자들은 떼를 지어 다리밟기를 했다.

▲ 수표교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坪)’이라는 글씨를 새겨두고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여전히 제자리 찾지 못한 수표교

선조들의 삶이 가득 담긴 수표교는 광복 후에도 수표석과 함께 명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59년의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돼 신영동으로 이전됐다가 1965년에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원래 자리에 다시 놓으려했지만,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기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석은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역사가 담긴 수표교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사진 속 옛 모습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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