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발달은 직업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가 하면, 많은 직업이 하나둘씩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 속,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추억의 직업들.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에겐 아련하고, 젊은이에겐 그저 신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는 법. 이와 관련,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직업을 알아봤다.

 

▲ 엿장수의 모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철컥 철컥~’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우던 아이들은 “왔다”하며 우르르 몰려 나갔다. 어디서 찾았는지 아이들 손에는 대병, 고무신, 고물들이 한두 개 씩 들려 있었다. 엿을 바꿔먹으려는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났다.

◆조선시대, 소년엿장수 등장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 엿장수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엿장수는 시장 한 곳에 앉아 엿을 파는가 하면, 엿목판을 끈으로 묶어 목에 걸고 다니며 팔기도 했다. 리어카가 등장한 이후로는 리어카에 엿판을 올리고 그 아래에 고물을 넣었다.

이 같은 엿장수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조선시대에는 보통 소년 엿장수가 많았다. 이는 조선시대를 보여준 그림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의 ‘씨름’ 한 쪽에는 엿 파는 아이가 있다. 기산 김준근도 ‘엿 파는 아이’를 그렸다. 그림 속 두 소년 모두 엿목판을 메고 있고, 가래엿을 팔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볼 경우 적어도 19세기 말에는 엿장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내아이들은 엿을 팔았을까. 보통 일반 백성의 집에서 엿장수를 많이 했다. 경제적 이유로 아이들도 쉴 수 없어서였다. 사내아이들은 보통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해 와야 했다. 여자아이들은 어머니를 도와 빨래, 바느질을 배웠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 품을 팔러 보내지기도 했다. 사내아이들은 주인집 소를 돌보거나 산에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때 광주리에 짚신 등 부피가 작은 것을 팔았는데, 가장 많이 판 것은 엿이었다.

▲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의 ‘씨름’ 한 쪽에는 엿 파는 아이가 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과거시험장서 엿 팔기도

엿을 파는 곳은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거행된 주요 행사를 그린 ‘화성능행도’ 그림 속에는 왕의 행차 주위에 백성이 몰려 있다. 행렬 곳곳엔 떡장수와 엿장수가 등장하는데, 화성 행차가 왕과 백성이 함께하는 큰 축제였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과거시험장 안에 들어가 파는 일도 발생했다. ‘영조실록(1773년 4월 9일)’에 따르면 지평 이한일이 임금에게 이같이 아뢰었다.

“이번 과거 시험장은 엄숙하지 못해 떡과 엿, 술이며 담배를 현장에서 터놓고 팔았습니다.”그러면서, 과거장의 질서를 단속하는 금난관을 파면시킬 것을 청했다. 이에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엿 길이, 엿장수 마음대로

시골에서는 현금이 아닌 곡식을 내어 엿을 바꿔먹기도 했다. 그래서 농촌으로 다니는 엿장수는 목판 밑에 직사각형 대광주리를 받쳐 메고 다녔다. 현금뿐 아니라 종이나 쇠, 빈병 등의 고물과 엿을 바꾸기도 했다. 이때 엿을 얼마나 줄 것인가는 엿장수가 임의로 결정했다. 그래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엿치기’ 놀이도 생겼다. 이 놀이는 엿장수와 손님 또는 손님들끼리 하는 것으로, 가래엿 가운데를 뚝 꺾어서 구멍이 큰 쪽이 이기는 놀이였다. 이 경우 진 사람이 엿 값을 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 같은 엿장수는 순수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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