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발달은 직업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가 하면, 많은 직업이 하나둘씩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 속,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추억의 직업들.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에겐 아련하고, 젊은이에겐 그저 신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는 법. 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직업을 알아봤다.

 

▲ 강동구 수도박물관에 있는 물장수 모형. ⓒ천지일보(뉴스천지)

물 구하기 힘든 가정 찾아가 물 팔아

물동이 지게 멘 채 맨발로 다니기도
상수도 공급되기 전 물장수에 의존

늘어나는 물장수, 자기 구역서 일해
독점적 권리 보장위한 수상조합 결성
상수도 보급 후 대한수도회사가 공급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물 사시오! 물 사시오! 시원하고 깨끗한 물 사시오.”

상수도가 없던 시절에는 물을 길어다 파는 물장수가 있었다. 오늘날과 달리, 우물은 그 시절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우물이 있어도 수질이 나쁘거나, 거리가 먼 가정은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이런 집은 물장수에게 물을 사야만 했다.

◆유일한 운반도구 ‘물통’

물장수는 1800년대를 전후해 생겨났다. 서울은 여름철에 3~4개월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대다수의 우물이 매말라 계곡물이나 하천물을 길어다가 먹어야 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물장수가 등장하게 됐다. 양조장이나 주막 등 물이 많이 필요한 곳은 가뭄 피해가 없어도 물장수에게 물 공급을 받았다.

물장수의 유일한 운반 도구는 ‘물통’이었다. 처음에는 지게로 물독을 졌고, 석유가 수입된 후 석유를 담았던 양철통 두 개를 이용할 수 있는 물지게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를 보면, 상투를 쓴 물장수는 물동이를 지게에 진 채 맨발로 다녔다.

◆물장수 증가… ‘북청 물장수’ 세력 커

개항 이후 국내에 들어온 많은 외국인은 맑은 물을 돈 주고 사 마셨다. 물장수는 자연스레 하나의 직업으로 고정됐다.

물장수가 많아지자 물장수마다 10~30호씩 단골 구역이 생겨났다. 각자의 구역은 다른 물장수가 침범하지 않는다는 규칙도 생겨났다. 이런 관행은 나중에 독점적이며 배타적인 영업권리가 돼 매매가 이뤄졌다. 독점적 권리를 상호 보장하기 위해 물장수는 수상조합을 결성하고 그들의 급수권을 관리했다.

물장수는 분명 힘든 직업이었다. 하지만 성수기에 물장수가 벌어들인 수입은 상당해서 당시에 인기 업종에 속했다고 한다.

특히 서울에서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 물장수의 세력이 컸다. 덕분에 ‘북청 물장수’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들은 고향 사람에게 숙식도 제공하고 장학사업도 했다. 이준 열사가 이곳의 장학생이었고 대한제국 황실의 세도가 이용익 대감도 물장수 출신이었다고 한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생략),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김동환의 시 ‘북청 물장수’다. 이 시만 봐도 물장수는 당시,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 강동구 수도박물관에 있는 물장수 옛 모습 사진. ⓒ천지일보(뉴스천지)

◆상수도 설치… 역사 속 사라지는 물장수

이처럼 물장수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는 가운데, 1908년 9월 1일 서울 시내에 처음으로 수돗물이 들어오게 됐다.

상수도를 보급했던 대한수도회사는 물장수의 실직 등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220개의 특설 공용우물을 만들고 수상조합과 계약을 맺었다. 물장수들은 공용우물에서 물을 받아 각 가정에 보급해 원래처럼 물 사용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물장수들의 물 사용료 체납이 빈번해지자, 1909년, 대한수도회사는 물 공급을 직영으로 바꿨다.

그러나 물장수들의 강한 반발로 수상조합에 의한 보급이 재개됐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유지됐던 수상조합체계는 1914년, 수상조합의 물 사용료 체납문제와 위생상의 문제로 결국 폐지됐다. 이로써 물장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고, 시민은 직접 공용 수전에서 길게 줄지어 물표와 물을 바꿔 집으로 가져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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