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에는 크고 작은 물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위에 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단순한 다리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수백년 된 다리는 오늘 날 온전한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우리 내 선조들의 삶 이 담겨 있었다. 이와 관련, 다리를 통해 옛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 살곶이다리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세종 때 공사 시작해 성종 때 완공
성종 “다리, 평지 밟는 것과 같아”
대청마루 깐 듯 판석 빈틈없어

조선시대, 강릉·충주 이어준 통로
이성계, 아들 향해 활 쏜 ‘살곶이’
성동구, 북측 교대서 발굴·복원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얼마나 오래 된 걸까. 아슬아슬해 보이는 데 멀리까지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돌 모양이 백설기를 평평히 붙여 놓은 느낌이었다. ‘푸르륵’ 강줄기를 따라 날아오르는 새들도, 시간이 멈춘 이곳이 좋은 듯했다. 현대 속에 고요히 자리 잡은 이 다리는 ‘살곶이다리(보물 제 1738호)’였다.

살곶이다리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한강으로 흘러드는 곳, 지금의 한양대학교 부근과 성수동 방면을 이어주는 다리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졌다. 이곳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다. 옛날에는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전곶교(箭串橋)라고도 불렸다.

▲ 살곶이다리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 초 최고 긴 다리

1420년(세종 2년) 처음 짓기 시작한 살곶이다리는 1483년(성종 14년) 완공했다. 처음 이곳에 다리를 만든 건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겼는데, 근처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했다.

이때 개천을 건너야 하는 수행 중신들의 고충이 심해지자, 태종은 다리공사를 명했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박자청을 통해 돌다리를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했지만, 완공하지 못했다.

태종이 죽은 후 이곳을 통한 행차는 거의 없어졌다.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開川)·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는 짓다 말게 된다.

하지만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이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을 다시금 제기한다. 이때 한 뛰어난 승려의 지휘 감독으로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가 성종 14년(1483년)에 완성된다.

이 다리의 길이는 258척(75.75m), 폭은 20척(6m)이었다. 당시 성종은 “다리가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니, 당시 다리 축조술을 엿볼 수 있었다. 교각은 가로로 놓인 돌기둥이 4열, 세로로 22열로 장대했다. 손으로 돌기둥을 만져보니 매우 단단하고 거칠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을 옮겨놓았을 큰 돌기둥. ‘어떻게 선조들은 옮겼을까’ 절로 궁금해졌다.

난간 없이 단순한 구조의 상판은 대청마루를 깔아 놓은 듯 세 줄의 판석이 빈틈없이 짜 맞춰있었다. 얼마나 정교한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듣도 보도 못한 이 다리의 출현 당시 한양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 살곶이다리 교각ⓒ천지일보(뉴스천지)

◆`살곶이' 지명 유래

살곶이 다리가 놓인 이 지역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했다. 신하들의 간곡한 청에 은둔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태조는 이곳 중랑천에서 태종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 태조는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태종이 차일을 치기 위해 세웠던 큰 기둥 뒤로 몸을 피하는 바람에 화살은 그 기둥에 꽂히고 말았다. 이에 태조가 천명임을 알고 이곳을 ‘살곶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살곶이다리 북측교대 발굴·복원공사 착수

조선시대 가장 큰 규모의 석교임에도 이 다리는 수차례 수난을 겪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돌들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다리 일부를 뜯어다가 석재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다리를 수리한다며 콘크리트로 덧칠했다.

1920년 발생한 큰 홍수로 다리 일부는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방치되다, 1970년대에 살곶이다리를 복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원형을 고려하지 않은 바람에 옛 다리의 자취는 사라졌다. 지금은 다리의 서편만 옛 모습이 남아있다. 현재 이곳은 보물로 지정돼있다.

▲ 살곶이다리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최근 성동구는 살곶이다리 북측교대 발굴과 복원공사에 착수했다. 2017년 말까지 진행되는 이번 공사는 현재 왕복 5차로의 제방 도로(살곶이길) 일부와 자전거 도로 등을 철거해 그 아래 묻혀 있는 살곶이다리 북측 교대 문화재 유물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이다.

살곶이다리 발굴 복원을 가장 바라는 것은 시민인 듯 했다. 현재 이 다리는 보존을 위해 보행자 위주로 통행이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자전거를 타던 상당수의 사람은 다리를 건널 때만큼은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남아있는 다리라도 소중히 보존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은 다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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