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어진을 관람하는 학생들. ⓒ천지일보(뉴스천지)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영조·철종’ 뿐
세종·정조 어진, 후손 골격 토대로 그려

인종, 어진 그리지 말라고 유언 남겨
숙종 이후 어진제작 활발…동시 제작
정조,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 제작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 동원돼 그려질 만큼 중요했다. 어진은 왕의 얼굴을 넘어,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다.

◆‘어진’ 용어, 언제부터 사용?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어진 외에도 진용(眞容)·진(眞)·진영(眞影)·수용(晬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어용(御容)·왕상(王像)·어영(御影) 등 다양했다.

이 가운데 어진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13년(숙종 39년) 숙종어진을 그릴 때부터다. 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였던 이이명(李頤命)이 어진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합하다고 건의했는데, 이게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진전(眞殿, 조선시대 선원전의 다른 이름)이라 하므로 왕의 화상 역시 어진이라 부르는 것을 타당하다고 봤다. 그래서 이때부터 어진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어용’도 조선말까지 병용됐다.

◆어진 제작방법

어진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제작돼왔다.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의 3종류로 구분된다.

도사는 국왕 생존 시 그린 것이고, 추사는 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린 거다. 모사는 기존의 어진을 본 떠 그린 것이다. 어진 제작 과정은 먼저 이를 담당할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원이 정해지면 밑그림을 그리고 배채기법으로 채색을 한다.

어진이 다 그려지면 장황(粧䌙,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을 하고, 표제(標題, 누구의 어진)를 쓴 후 진전에 봉안했다.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 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吉日吉時)를 택해 진행했다.

털끝 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했고, 초상화에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어진을 비롯해 한국초상화 제작기법에서 독특한 것은 배채법으로 화면의 뒷면에서 안료를 칠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하면 뒷면에 칠해진 안료가 얇은 비단 화면을 통해 색채를 드러내는 만큼 은은하고 깊은 색감을 줬다.

▲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을 관람하는 시민.ⓒ천지일보(뉴스천지)

◆현존하는 어진과 역대 왕들의 어진제작

태종에서 철종 대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남아 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그 후손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표준영정(국가 공인 영정)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거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조선 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 왕대에 그렸다.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됐다. 하지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보존해 뒀다.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았고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작되지 못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 제작여부를 알 수 없다. 또 조선중기의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

숙종 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했다.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했다. 정조도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했다. 순조의 세자였던 익종(추존 왕)은 22세에 사망했음에도 예진(睿眞, 세자의 초상화)을 8본이나 제작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이나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

◆경기전 유일 ‘태조어진’

태조어진(국보 317호)은 건국자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를 상징한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태조어진이 26축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태조어진은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색의 곤룡포,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에 가슴과 어깨에는 왕을 상징하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이 그려져 있다.

1872년 모사본이지만 조선 초의 어진 제작기법을 담았다. 곤룡포도 역대 임금들이 홍룡포를 입은 것에 반해 태조는 청룡포를 입고 있다. 태조는 기록에 의하면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큰 귀가 아주 특이하다고 했다. 태조어진을 보면 넓은 광대뼈에 눈과 입이 작으며 양쪽 귀가 큰 모습이다. 오른쪽 눈썹 위에는 사마귀까지 그려져 있어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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