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계속돼야 한다”… 임진왜란 중 조선왕조실록 지킨 ‘전주사고’
“역사는 계속돼야 한다”… 임진왜란 중 조선왕조실록 지킨 ‘전주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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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경기전 내에 있는 전주사고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삼조실록 편찬, 보관 중요성 느껴 사고 4곳 짓고 나눠서 봉안
임란 때 ‘성주·충주·춘추관’ 소실, 전주사고도 위험 직면해

침공 예상돼 내장산·아산·강화도 등으로 실록 계속 옮겨
종전 후 실록 다시 제작해 보관, 역사에 대한 사명감 묻어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실록(實錄, 임금의 사적 기록)’을 보관하던 사고들이 불탔다. 그 중 유일하게 ‘전주사고(현재 경기도 전주시 경기전 내)’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위험했다. 왜군의 눈을 피해 신속히 실록을 빼내야 했다. 실록을 지키는 건 나라의 중차대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시대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시에 편찬된 사서가 아니라, 대대로 편찬한 것이 축적돼 이뤄졌다. 대체로 조선시대에는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 때에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해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상례였다.

▲ 전주 경기전 내 전주사고에 사진으로 전시돼 있는 ‘오대산사고(위)’와 ‘적상산사고’ ⓒ천지일보(뉴스천지)

◆실록 보관한 ‘사고’

왕의 행적이 기록된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특별히 사고(史庫)를 설치해 봉안해왔다.

1413년(태종 13) 처음 ‘태조실록’이 편찬됐다. 이어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1431년에 ‘태종실록’을 편찬했다. ‘태종실록’ 편찬 직후 정부에서 보관의 필요성을 느껴 편찬된 삼조실록(三朝實錄)을 고려시대의 실록이 보관된 충주사고에 봉안했다.

그런데 충주사고는 민가가 밀집한 시내에 위치해 화재의 염려가 있었다. 1439년 6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설치했다. 그리고 1445년 11월까지 3부를 더 등사해 모두 4부를 만들어 성주·충주·춘추관·전주의 4대 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했다.

실제로 성종 4년 8월 26일 춘주관에서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전주의 새로 만든 사고에 전후 실록을 지금 모두 옮겨 놓도록 하소서. 무릇 지방 사고는 늘 3년마다 한 번씩 포쇄함이 상례입니다. 매년 장마철에 비가 샐까 염려되니, 사궤(史匱)는 열고 닫을 수 없는 것이지만, 비가 새는 곳은 그 도(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매년 장마가 끝난 뒤 살피어 계문하도록 하소서.” 이를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 임진왜란 당시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피난가던 모습을 재현한 것. ⓒ천지일보(뉴스천지)

◆임진왜란, 전주사고 실록의 피난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거의 모든 사고가 한꺼번에 재난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

그해 4월 27일 성주가 함락되고 그다음 날 충주가, 그리고 5월 2일에는 한양이 왜적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성주·충주·춘추관 사고가 차례로 불타버렸다. 그러면서 그 안에 안치했던 실록을 비롯한 사료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 또한 6월로 접어들면서 왜적이 전주로 접근함에 따라 소실될 위험에 직면하게 됐다. 상황은 다급했다.

이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영정과 사고의 실록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할 궁리를 했다. 그러나 13대 임금의 실록 총 805권 614책, 기타 전적 등을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서는 말 20여필과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혼자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할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는 명망이 나 있던 선비 손홍록을 찾아가 의논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이오니 도움을 청하옵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 임진왜란 당시 안의와 손홍록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이성계 어진을 내장산으로 이안하고 숙직하면서 작성한 기록물인 ‘수직상체일기’ ⓒ천지일보(뉴스천지)

손홍록은 그의 나이가 56세임에도 뜻을 같이 하기로 결심한다. 손홍록은 학문을 같이했던 고향 친구인 안의와 조카 손숭경, 하인 30여명과 함께 전주로 달려갔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1년 동안 지켰다.

하지만 계속해서 호남지방 침공이 예상되자, 내장산을 떠나 아산으로 옮겼다. 이후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다. 그 뒤로도 전주사고 실록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강화도로, 영변으로 옮겨졌다. 마지막에는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 다니다가 종전을 맞아 간신히 살아남게 됐다.

이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이 다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4대 사고를 지어 각각 1부씩 보관했다.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반출되는 등 큰 변화를 겪기도 했다. 이처럼 수난을 반복한 실록은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 속에는 나라의 역사를 지켜야 한다는 선조들의 사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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