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조선시대 허균을 우리는 흔히 ‘홍길동전’을 쓴 문학가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허균은 그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였다. 허균은 적자임에도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서얼이 겪는 고통을 체험하면서 자랐다.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인물이었다. 또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양반가문의 여인으로서 조선시대의 황진이와 더불어 여류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울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었다.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 받고 있던 허균은 1606년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맞이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문장과 학식이 뛰어남을 인정받았다. 허균은 그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소개하여 그 글이 중국에 출판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허균은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학문을 수학했으며 둘째 형의 친구 이달한테서 시를 배웠다. 그는 26세 때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3년 후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한 후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지만 서울의 기생들을 불러들여 놀았다 하여 탄핵을 받아 6개월 만에 파직이 되었다. 그는 벼슬길의 행운도 많았으나 그때부터 탄핵의 대상이 되어 복직, 파직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관직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벼슬길은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량,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떠났다. 그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했을 때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삼척부사에 복직되었으나 또 불교를 믿는다고 파직, 얼마 후 공주목사에 복직하였다가 서얼출신들과 가까이 지낸 혐의로 다시 파직되었다.

그는 전라도 부안으로 내려가 한동안 기생 계생을 만나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내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다시 종사관이 되었다. 그는 그때도 공로를 인정받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과거 시험관으로 있으며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떠났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하다가 광해군 때 계축옥사에 관련된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 출신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시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는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허균은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의에 복직되고 이어 승무원 책임자로 두 번이나 천추사 자격으로 중국을 다녀왔었다. 그는 중국 문헌에서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는 일약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좌참찬으로 승진했다.

허균은 인목대비 폐비론 세력에 동조하는 일방 그동안 자신 주변세력과 서인들을 규합하여 은밀히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 서얼 차별을 없애고,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그 혁명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부하 현응민이 불심검문에 붙잡혀 역모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허균은 군사를 이끌고 온 이이첨에게 그의 핵심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조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허균은 조선시대 조광조나 정여립처럼 불합리한 왕도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운 혁명가임이 분명하다.    

허균의 관직생활이 조선시대의 벼슬아치로는 보기 드물게 골곡이 많았던 것은 문학가로서의 자유분방한 뜨거운 피가 격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 개혁을 위해 야망을 불태웠던 성공하지 못한, 실패한 혁명가로서의 허균의 삶을 재조명해 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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