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촌토성 ⓒ천지일보(뉴스천지)

백제 첫 도읍지 한성 어디였나
몽촌·풍납토성 수도로 추정돼
다양한 백제 유적 출토가 이유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고대국가 한성백제. 하지만 500년간 이어진 초기 백제 수도의 위치는 지금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고려중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남위례성(한성)에 도읍을 정하니 북으로 한수를 두고 있다”고 쓰여 있다. 하남위례성은 과연 어디였을까. 유력한 곳은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현재까지 풍납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해, 몽촌토성이 풍납토성과 함께 왕성일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규모 유적이 발견돼 학계의 열기는 뜨거웠다. 몽촌토성은 오늘날 송파구의 중심도로를 따라 천호동으로 가다가 있는 성내천 옆 낮은 야산이다. 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단장됐지만, 야산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만든 토성이다. 산이면서도 성인 것이다.

▲ 삼국시대 활동 영역 ⓒ천지일보(뉴스천지)

◆초기 백제시대 `한성'

백제의 역사는 수도 위치에 따라 한성시대(BC18~AD475)~웅진(공주)시대(475~538년)~사비(부여)시대(538~660년)로 나뉜다. 

백제가 처음 수도로 삼은 곳은 하남위례성이다. 고구려가 침입해 백제왕을 죽이자, 백제는 서둘러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겼다. 공주에서 힘을 기른 백제는 성왕이 다스릴 때 공주를 떠나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이에 백제의 수도는 세 곳이 된다.

하남위례성의 수도가 풍납토성, 몽촌토성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다양한 백제 유적이 출토돼서다.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을 북성, 몽촌토성을 남성으로 추정해 왔다. 

▲ 몽촌토성 ⓒ천지일보(뉴스천지)

◆`바둑' 때문에 멸망한 한성 백제

백제 웅진·사비기와 달리, 하남위례성의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다. 제 위치를 찾기도 어렵다.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순간에 함락됐기 때문. 사라져 버린 백제의 500년,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고구려는 백제를 꺾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미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 때는 한강 이북을 차지했다. 하지만 백제를 함락하는 것은 어려웠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났고 두 나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남침을 견제하기도 했다. 그냥 밀고 내려갈 경우 버거운 싸움이 분명했다. 

장수왕은 고민에 빠졌다. 이때 승려 ‘도림’이 장수왕 앞에 등장했다. 도림은 죄를 짓고 도망하는 것처럼 꾸며 백제에 들어갔다. 백제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좋아했다. 도림도 바둑 수준이 상당했다. 이를 이용해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로왕과 바둑을 두던 도림이 한 가지 청을 올렸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구릉과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하늘이 베풀어준 요새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형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성곽은 정비되지 않고 궁실은 수리되지 못한 곳이 많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땅 위에 임시로 묻혀 있고, 백성들의 가옥은 번번이 강물에 허물어지니, 저는 차마 왕을 위해 이런 것들을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몽촌토성 목책, 중요한 방어시설 ⓒ천지일보(뉴스천지)

도림의 말에 부끄러워한 개로왕은 즉시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를 한 도성은 화려했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많은 문제가 숨어 있었다. 나라 창고는 텅 비었고, 백성의 생활은 비참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만 같았다. 

고구려는 이 틈을 노렸다. 장수왕은 3만 대군을 이끌고 한강을 밀고 내려왔다. 개로왕은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라며 뒤늦게 후회했다. 

결국 백제는 7일 만에 함락됐다. 성은 쑥대밭이 됐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처참히 죽었다. 500년 한성 백제의 영광은 한순간에 먼지처럼 사라졌다. 

◆몽촌토성 vs 풍납토성, 왕성은 어디

그렇게 영원히 묻힐 것만 같았던 한성백제였다. 하지만 88올림픽을 즈음해 몽촌토성이 세상 빛을 보게 됐다. 1983~1989년 올림픽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됐는데, 총 6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성의 규모와 축조방법, 내부시설물, 유물 등이 하나씩 알려졌다. 발굴을 주도한 학자들은 “한성백제시대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 돼서 상황은 역전된다. 풍납토성이 출현해서다. 1997년 세상에 모습을 보인 풍납토성.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엄청난 유물과 유적을 쏟아냈다. 마치 그동안의 주장을 반증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왕성터는 풍납토성이란 설이 유력해졌다. 몽촌토성은 왕실이 피난하는 배후성으로 위상이 줄어들었다.

▲ 삼국시대 1호 도로 전경(항공촬영)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대형도로 발견, 백제 미스터리 풀리나

그러다 지난해 11월, 반전의 사건이 발생했다. 몽촌토성에서 ‘관(官)’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과 대형 포장도로가 발견된 것. 

사실 그동안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유물, 유적은 초기 백제사를 규명하는 데 소중한 자료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도성으로서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터나 관청터, 혹은 최고 지배층이 사용했을 법한 유물이 아니어서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발견으로 몽촌토성이 배후성이 아니라 풍납토성과 짝을 이루는 도성일 가능성이 커졌다. 실제로 몽촌토성 북문지 안쪽에서 삼국 시대 포장도로 5기가 발견됐는데, 그중 1호 도로는 폭이 무려 18.6m나 됐다. 기존에 풍납토성 등지에서 확인된 약 13m 도로보다 훨씬 더 넓었다. 특히 1호 도로는 북쪽의 풍납토성으로 방향이 나 있었다.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은 “이 정도의 규모의 도로는 고대 도성 유적에서 사실상 처음 확인됐다”며 “1호 도로는 북문 터 바깥으로 뻗어 북쪽의 풍납토성으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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