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내거라”… 뺑뺑 돌아 유배 간 죄인 ⓒ천지일보(뉴스천지)

유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벌
외부와 차단돼 외로움과 싸워
정국 변해 풀려나 돌아오기도

복귀 가능성 따라 대우 달라져
고을서 생계 책임 회피 다반사
유배인, 훈장질·동냥으로 연명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죄인을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내 거라.”

조선시대 한 관리가 죄를 지어 멀리 귀양을 가게 됐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조선의 국토가 넓지 않아, 3천리나 떨어진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의금부에서는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죄인을 귀양지로 바로 보내는 게 아니라, 뺑뺑 돌아서 3천리를 이동하게 했다.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 ‘유배형’

조선시대 유배형(流配刑)은 사형 다음으로 중한 징벌이었다. 유배형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내쫓아 버리는 추방형으로, 보통 기한이 없는 종신형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무기징역에 가까운 형벌이었다. ‘귀양살이’라고도 불렀다.

유배형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세상과의 단절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도 있었다. 집 주위에 울타리를 쳐서 둔다는 말로, 멀리 귀양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탱자나무를 집 주위에 촘촘히 둘러 외부와 차단하는 형벌이었다. 그야말로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유배형이 종신형임에도 상당의 유배죄인은 정국의 변화나 특별한 사정에 따라 풀려나 자신의 생활근거지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 중앙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中 ‘대명률’ 바탕으로 제정

조선시대 형률은 중국의 ‘대명률’을 바탕으로 제정됐다. 원래 유배지 거리는 2천리, 2천 5백리, 3천리로 나뉘었다. 하지만 중국과 달리 조선은 국토 길이가 짧다보니 이 법이 현실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 때 이동 거리가 수정됐다. 2천리는 600리, 2천 5백리는 750리, 3천리는 900리로 바뀌었다.

그래도 왕에게 미움털이 박힌 죄인은 뺑뺑 돌려서 3천리를 채워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유배형은 신분에 관계없이 적용됐다.

유형의 집행은 국왕의 윤허(명령)를 받아 관직자일 경우에는 의금부,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형조에서 집행했다. 유배형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정치가가 세력을 잃으면 반대파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궁핍한 유배인의 생활

귀양살이의 대우는 귀양지와 관직복귀가능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우선 먹고살 만한 고장으로 귀양 온 사람에게는 일정한 거주지를 마련해줬다. 생필품을 챙겨주기도 했다.

귀양 온 사람이 관직에 복귀할 가능성이 크면 백성과 관리가 융숭하게 대접했다. 반면 복귀 가능성이 낮은자는 비록 정승을 지냈어도 능멸과 모욕을 받았다. 고을에서는 유배 죄인을 먹여 살릴 책임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런 책임은 회피되기 일쑤였다. 유배죄인을 떠맡을 보수주인을 정하기도 쉽지만은 않았다. 또 보수주인이 정해져도 주인의 살림이 넉넉지 못한 경우에는 유배죄인이 스스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알아봐야 했다. 글줄깨나 읽은 사람은 아이를 모아 서당 훈장질을 하면서 양식을 해결했다.

다산 정약용도 순조 원년(1801)옥에 갇힌 후, 그해 10월부터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강진에 온 이듬해부터 글방을 열어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정약용도 귀양살이가 서러웠는지, 이런 시를 짓기도 했다. ‘조금 궁하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크게 궁하면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

글재주도 없는 사람은 날품팔이로 하루하루를 꾸려나가거나 동냥을 해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유배생활은 결국 외로움, 배고픔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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