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한 해의 묵은 숙제가 쌓여 버거워질 때 항상 새해는 불현듯 눈앞에 나타난다. 연말연시라고 세월이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엄벙덤벙 그 묵은 숙제에 사로잡힌 채 어느 새  발걸음은 새해의 시간을 걷는다. 매년 원단(元旦)으로부터 시작해 한 해를 산다는 것은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고 줄여가는 과정이 아니라 연말을 향해 늘려가고 무겁게 하는 과정이기 쉽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대개는 어깨를 짓누른 인생 십자가의 무게에 겨우 버티어낸 숨이 가쁘게 헐떡여지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 해의 성취와 결실이 뚜렷해 벅찬 보람을 안고 더 큰 성취의 목표를 세워 새해를 맞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 여간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삶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이 땅이 결코 절망의 땅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삶에 지쳤거나 지쳐가는 사람들도 이 땅에서 아주 ‘버림받은 사람들(the wretched)’이 아니라 얼마든지 ‘희망’이라는 보석을 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를 침공해 불볕의 사막을 행군하느라 갈증과 피로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나폴레옹 군대 앞에 갑자기 오아시스의 청정한 물과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녹색의 푸른 나무들이 나타났다. 그것에 미칠 듯이 고무되어 그들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그 오아시스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아뿔싸, 그것은 헛것이었다. 분명히 그것이 보인 자리에 다다른 것 같았으나 그것은 더 멀리로 달아났다. 그 헛것은 그렇게 몇 번이나 죽도록 지친 나폴레옹 군대를 속이고 속인 끝에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대기의 밀도와 온도의 차이가 먼 물체에서 반사되어 오는 빛을 굴절시켜 빚어내는 사막의 신기루(mirage) 현상이다. 이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때가 처음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그 과학적 설명이 신기루의 신비성을 앗아갔다고는 할 수 없다. 신기루는 여전히 신비스럽다. 

어쩌면 인생이 이처럼 신비한 신기루와 같은 허상, 말하자면 막연한 희망에 이끌리어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현대복지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충분한 국가 도움과 이웃의 관심이 없다면 그런 막연하고 허망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확실히 지도자의 실수가 탄핵을 자초해 정치와 국정(國政)의 전반이 엉망이 되고 그 지도자의 실정(失政)으로 국민 각자가 애초에 조심스럽게 계획한 삶의 방식과 규칙성을 상실하게 됐다면 우리는 사막의 신기루를 쫓는 무익한 한 해를 보낸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흐르는 세월에 실려 새해에 성큼 들어서긴 했으나 그 신기루를 쫓다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묵은 숙제에 사로잡혀 어려운 출발과 편치 않은 항해가 불가피한 한 해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고사(故事)의 ‘기우(杞憂)’가 아니고 당장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지는 광경에 새 것은 없다. 그중에서도 묵은해로부터 이월된 대권(大權) 싸움, 본격 막이 오르는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그로 인한 어수선함, 계속되는 ‘하야(下野)’ 시위와 반(反)하야 시위 등이 우리를 가장 숨 막히게 한다. 

그 싸움은 항상 국민과 민생을 볼모로 잡고 있다. 따라서 권력의 쟁취가 목적인 정치 현장에 온갖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적인 행태가 춤추지 않을 수는 없으나 어디까지나 그 싸움은 냉철함을 유지하는 금도(襟度) 안에서의 싸움이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처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엄중한 상황을 유의해 정치인이나 국민 모두 ‘돌을 던져 쥐를 잡되 그릇 깨는 것을 걱정’하는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염려와 도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로 한다면 정치인은 우선 시위 군중을 선동하지 말아야 하며 국민은 정치인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국가 운명과 개인 운명이 같이 가는 일체화 시대다. 국민을 섬겨야 하는 국가와 정치가 지난해와 같이 샛길로 빠져 민생을 북돋아주지 않으면 개인의 삶은 신기루와 같은 허상의 희망을 쫓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라와 정치가 바로 서야 국민이 실체 있는 희망을 가지며 행복해질 수 있다. 이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순환논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고 있는 현재의 난국과 ‘혼란(chaos)’은 마땅히 실체 있는 희망을 국민에게 창출해 선사할 수 있는 새 시대와 새 역사, 착한 정부와 좋은 정치를 탄생시키는 모태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인간이 왜 사는지, 인간이 무엇인지 등의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몰라도 ‘희망’이라는 동기에 이끌리면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 또한 인간의 삶과 그 삶을 이끄는 희망이 갖는 신비함의 일부다.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안다면 사람이 더 자유로워지고 살맛을 더 느낄지 그 반대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난다 긴다 한 철학자들이 숱하게 이 세상에 와 살다가면서 그 문제를 탐구했으나 허사였다. 해답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의문만 더 키워놓았다. 어떤 경우는 잡설과 괴이한 이론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한 느낌도 없지 않다. 대를 이어 탐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성과는 여전히 도로(徒勞)에 머문다. 마치 지옥에서 산꼭대기에 바위를 굴려 올리지만 다시 굴러내려 언제나 제자리인 벌(罰)을 받고 있는 시지퍼스(sisyphus)의 헛공사와 같다. 그래도 사람은 희망에 이끌리어 신비하게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만큼 사람의 삶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이유를 알든 모르든 피할 수 없는 절박하고 엄연한 현실이며 실제다. 이래서 어느 해든 사람의 삶은 항상 정직하고 어김없으며 실제적인 인과응보(因果應報)적 토대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현실은 변함없이 ‘종두득두(種豆得豆)’,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이치’로 돌아간다. 작년의 우울함이 청산되지 않았다면 새해 출발이 밝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이래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올해의 짐이 더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곧 또 다가올 새해를 향해가는 신비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을 이끌어가는 희망이 위축되고 꺾일 수는 없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