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가 지난해 11월 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제주해녀문화는 우리나라의 19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당시 무형유산위원회 회의에서는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점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점 ▲관련 지식과 기술이 공동체를 통해 전승된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해 공식 등재했다. 이와 관련, 제주해녀문화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보고자 한다.

 

▲ 물에 들어가기전 수경 닦는 제주해녀들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그야말로 공동체였다. 벗이 있었기에 물질을 했다. 그 속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었다. 그것은 제주해녀문화가 주는 또 다른 교훈이었다.

◆해녀 공동체 물질작업 

해녀는 물질(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삼·전복·우뭇가사리 등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 작업을 통해 동료에게 물질경험과 지식을 배웠다. 이는 자신의 물질기량을 높이는 데 중요했다. 동료해녀는 물속에서 닥칠 위험을 예방하는 보호막 역할도 했다. 이 같은 제주해녀문화는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전승됐다.

지난달 30일 손명희 국립무형유산원 학예연구관은 “얼핏 보면 제주해녀의 물질이 개인 활동처럼 보이지만, 공동체 성격을 갖고 있다”라며 “물질 자체가 어머니에서 딸로, 그리고 같은 동료로 대대로 전승됐고, 본인의 노하우를 터득해 갔다”라고 설명했다.

▲ 국립무형유산원에 전시돼 있는 ‘온평초등학교 제8회 졸업식 사진’.ⓒ천지일보(뉴스천지)

제주도의 각 마을에는 마을어장의 어업권을 갖고 있는 어촌계가 100개 있다. 이 어촌계 산하에는 ‘해녀회’가 있었다. 물질기술에 따라 제주해녀 공동체는 ‘상군·중군·하군’ 등 세 가지 집단으로 나뉘었다. 오랜 기간 물질을 해 물질기량이 뛰어나며, 암초와 해산물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상군 해녀가 해녀회를 이끌었다.

해녀회에서는 어장인 ‘바다밭’에서 언제 어떤 해산물을 채취할지, 마을의 상이나 혼례 때 어느 정도 물질작업을 쉴지 등 물질작업과 관련된 제반 일에 대한 결정을 했다. 물질작업의 본질은 협동이기에 해녀회 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어업활동에 기여한 산지어촌계장을 맡은 해녀는 제주어업협동조합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63년 당시 제주시 산지어촌계장을 맡은 김은 해녀도 공로를 인정받았다.

어촌계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어업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도어촌계’ 대장을 보면, 소라, 전복, 성게, 해삼, 문어, 오분자기 등 해녀가 채취하는 해산물에 대한 단가, 판매금액, 수수료 등의 내역이 일별로 기록돼 있다. 또 각 동에서 해산물을 판매하고 받은 전표 등은 당시의 어업경제 활동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 국립무형유산원에 전시돼 있는 온평초등학교 운동장 내에 설치했던 ‘해녀공로비’ⓒ천지일보(뉴스천지)

◆‘학교바당’ 공동물질 작업

해녀는 바다의 한 구역을 정해 공동물질 작업을 했다. 공동물질 작업을 통해 생산되는 수익금은 마을의 공익적 사업에 사용했다. ‘학교바당’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육성회비를 충당하거나, 소실된 학교 건물을 신축하는 건립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마을 정비에도 사용했다.

손 학예연구관은 “1950~1970년대에는 학성회비를 못 내는 학생이 많았다”며 “학교바당을 통해서 채취한 해산물 수익금은 육성회비를 못 내는 학생에게 지원됐다”고 말했다. 이어 “1950년 화재로 온평초등학교의 전 교실이 소실됐었다. 이때 성산읍 온평리 해녀들이 ‘학교바당’을 정하고 여기서 모은 수익금 전부를 1958년까지 학교 건립자금으로 헌납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1955년 ‘온평초등학교’의 졸업사진이 일부 재건한 학교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교 측은 감사의 뜻으로 1961년 ‘해녀 공로비’를 운동장에 세웠다. 이 공로비의 비문에는 “온평리 해녀들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노력해 가르치는 일을 도왔기에 그 공덕을 밝힌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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