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병신년(丙申年) 2016년.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로 기록됐다. 본지는 올해 발생한 사건·사고 중 국민적 관심이 높고 떠들썩했던 사건·사고 이후를 추적해 봤다. 이를 통해 현재 상황은 어떠하며 아직 해결하지 못한 쟁점은 무엇인지 되짚어봤다. 분명한 것은 당시 제기된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2017년에도 유사한 사건·사고에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지난 5월 19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한 시민이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앞서 5월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20대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칼로 수차례 찔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강남역을 비롯한 전국 9개 지역에서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전국 9개 지역서 추모 물결
“여성혐오 사회 구조적 문제”
여성, 자기 목소리 표현 시작

[천지일보=김민아·강병용 기자] “그동안 폭력을 당했을 땐 가만히 있었어. 무서웠고, 그래서 침묵했어. 사실 폭력을 당하고도 그게 폭력인지 몰랐을 때도 있었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덕분에 내가 당해온 폭력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어. 이젠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좀 더 일찍 용기를 내서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냥 내버려둬서 미안해. 다시 태어났을 땐 좋은 세상에서 살자.”

지난 5월 17일 새벽 1시 7분 서울 서초구의 한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칼로 수차례 찔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살해 동기로 “사회생활에서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살해 동기가 알려지며 강남역을 비롯한 전국 9개 지역에서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사고 장소와 가까운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 추모 문구를 적은 접착식 메모지가 일주일 만에 2만개 이상 붙었다. 서울을 비롯한 9개 지역의 추모메시지는 총 3만 5350건에 달했다.

이 사건은 올해를 대표하는 사건 중 하나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사회도 본격적으로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추모메시지의 절반 이상은 ‘고인에 대한 명복(63.7%)’이었지만, ‘여성혐오범죄(19.6%)’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12.5%)’ ‘미안합니다(11.3%)’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7.5%)’ 등 사건에 대한 정의와 앞으로의 변화 의지를 표현한 글도 다수였다.

실제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공포와 분노를 느낀 여성들은 안전하게 밤길 다닐 권리를 요구하는 달빛시위에 나서거나,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공동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사건 추모 참여자를 향한 성희롱과 악성댓글에 대한 인권침해 집단 소송도 제기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인사들로부터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했다는 폭로가 줄을 이었다. 가요계에서는 방탄소년단과 산이, DJ DOC가 여성혐오 가사로 뭇매를 맞았다.

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의료인의 진료행위 처벌 강화 추진에 대해서는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인권탄압”이라며 강한 반발을 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여성운동가들은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집단적 움직임에 추진력을 얻어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집단적으로 이뤄지면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고, 온라인에만 머물러 있던 여성혐오에 대한 분노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게 서가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의 설명이다.

이지원 강남역10번출구 운영자는 “개인이 겪은 경험으로 치부됐던 성폭력, 성희롱, 직장 내 성차별 등의 다양한 성문제를 논란의 중심이 된 ‘여성혐오’라는 단어에 묶어냄으로써 이 같은 현상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성 대상 강력범죄 최고형 구형, CCTV 증설, 신축건물 남녀 화장실 분리 등 사건 이후 정부가 내놓은 여성 대상 강력범죄 종합대책에 대해서는 2~3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매겼다.

이 운영자는 “사건 이후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전부 행정 편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기 때문에 꾸준히 비판해 왔다. 일시적인 단속 강화 등으로는 여성혐오 범죄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남녀고용평등법, 호주제 폐지, 육아휴직 등 법·제도적 차원의 개선은 사건 이전부터 이뤄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얼마나 잘 실행되고 있느냐는 다른 영역의 문제다.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의 효과적인 시행을 위해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단속과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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