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허봉렬 선생님!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필자 어머니가 87세의 노구를 힘들게 휠체어에 의지한 채 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한 날입니다. 하루하루 심해지는 치매증상과 만성적인 허리·다리통증에 함께 시달리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들인 보호자로서 걱정도 많았고 의료진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소생은 몇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선 병원장님인 허 선생님이 키도 크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연세가 만 74세였습니다. 둘째, 병원장님이 뒤편에서 팔짱끼고 뒷방늙은이처럼 편하게 지내는 것을 거부하고 후배 의료진과 똑같이 환자를 직접 진료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입원 당일부터 병원장님이 병실에 올라와 오랜 시간 보호자와 대화하며 환자의 상태를 세밀히 문진해주는 점이 달랐습니다. 넷째, 매일 아침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병실에 대한 회진을 매일 2~3차례씩 꼬박꼬박 실시합니다. 다섯째, 휴진일인 토·일요일에는 간호사실에 전화해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필요하면 투약처방도 조치합니다. 여섯째, 병원장님은 그 어느 의사보다도 겸손하고 자상합니다. 일곱째, 병원에는 임상경험 풍부한 베테랑 간호사들이 많아 노인건강관리에 관한 소중한 지식들을 접할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선생님! 어머니는 척추수술 후 전신마취 후유증으로 환각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섬망(delirium)’과 수술 전 초기치매증세가 한 데 겹쳐 인지상태가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나가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과다이상행동이 심해져 감당하기 힘든 상태가 됐습니다. 가족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느 한 생각에 꽂히면 심한 편집증적인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계속 혼자 중얼거리며 밤새 한잠도 안 자고 뜬 눈으로 지새는 것이었습니다. 비현실적인 언행으로 어디론가 떠나자고 자꾸 주위에 강제해 돌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결국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등에 의존해 강제취침 시키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한 간병인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 선생님이 계신 노인전문병원입니다.

“병원과 의사와의 인연, 혹은 운기가 맞아떨어지면 혹시 완화될 수도 있습니다.”

간병인이 우리 가족에게 전한 위로의 말입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슴에 안고 입원시켰지만 그 후에도 어머니는 이상행동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두 달 동안 케어하면서 약을 조금씩 교체하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면밀히 처치하면서 어머니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빠진 뇌기능을 온전히 정상으로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의식이 눈에 띄게 맑아졌습니다. 특별한 이상행동도 적어졌습니다. 지금은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비교적 안정된 병실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허 원장님은 젊은 직원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열정을 가진 분입니다.” 병원 송년잔치에 봉사차 들러 공연한 가수 서수남씨가 한 말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라는 소설이 있지만 선생님에게는 ‘노년은 아름다워라’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로 활동해온 선생님은 1968년 세워진 대한노인병학회의 창립멤버라고 들었습니다. 서울의대에서 27년간 봉직한 후 퇴임하자마자 곧바로 일산암센터, 경기도 의정부병원, 세종 선의병원을 거치면서 단 한 차례의 휴가도 즐기지 않고 노인진료와 노인건강연구 등에만 매진해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임금이 체불돼 있던 의정부병원 재직 때는 정치력을 발휘해 병원경영 정상화라는 큰일도 해냈다고 들었습니다. 환자들을 위해 새벽기도까지 하는 선생님은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도록 맡기고, 주님 모시듯 일을 하며, 하나님의 축복은 힘든 일을 하는 이와 함께’라는 성경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국가적으로 어렵고 국민들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허 원장님처럼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뜨거운 투혼과 책임감만으로도 반짝반짝 빛나는 삶들입니다. 부천시립노인전문병원, 노인성 질병으로 고통 받는 어르신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있는 삶을 찾아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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