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 내 소나무들과 함께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천지일보(뉴스천지)

국내 최초 가톨릭 사제 김대건

천주교 씨 뿌리다 26세 처형돼

4대 걸친 순교자 배출한 솔뫼성지
복원된 김대건 신부 생가 뒤편
200년 이상 수령 소나무 우거져

높게 세운 못 박힌 예수상 인상적
교황 방문으로 관광객 발길 늘어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중략)…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을 위해 살라.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중략)… 우리는 미구에(조만간) 전장(戰場)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성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내용의 일부분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담담히 교우들을 걱정하는 의젓한 모습이 느껴진다. 그는 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했을까.

당시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 그는 이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단 이유로 체포돼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해인 1846년 9월 16일, 회자수(사형수의 목을 자르던 사람)는 칼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군문효수형은 조선시대 중죄인에게 내린 형벌 가운데 하나로 목을 베고 군문에 매달던 형벌을 말한다.

김대건 신부는 체포돼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순교 후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로,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다.

▲솔뫼성지 입구. ⓒ천지일보(뉴스천지)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로 떠나보자. 천주교 신앙의 묏자리라고 불리는 이곳은 푸른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우거져있다. 소나무가 산을 이뤘다고 해 순우리말인 ‘솔뫼’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이름답게 성지 내에는 200~300년을 웃도는 다양한 수령을 가진 소나무들을 볼 수 있다.

솔뫼성지는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와 더불어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부친 성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46년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솔뫼성지가 천주교 신앙의 묏자리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입구에서부터 계속 눈에 들어온 것은 ‘십자가(十字架)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 앞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은 성지 어느 곳에 있어도 보일 만큼 높게 설치돼있고, 출입문과의 거리가 가까워 쉽사리 눈에 밟힌다.

‘십자가의 길’은 순례자들이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숲속에 설치된 길을 말한다. 이 길은 2가지 테마가 있다. 예수의 손을 주제로 모자이크화가 있는 길과 청동으로 만든 인체 크기의 환조가 있는 길로 나눠진다. 길 걷는 내내 양옆으로 설치된 고난을 받는 예수의 조각상 등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십자가의 길’은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또는 비아 크루치스(Via crucis)라고 하는데, 이는 ‘슬픔의 길’ ‘고난의 길’ ‘고통의 길’ 등을 뜻한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었던 800m가량의 길과 그 언덕에서의 십자가 처형, 바위 무덤에 묻힐 때까지의 전 과정이 이 길을 통해 표현됐다.

▲2004년 복원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천지일보(뉴스천지)

예수상에서 출입문 쪽을 바라보면 ‘솔뫼 아레나’ 원형공연장 주위에 예수의 열두 제자(사도)의 동상이 눈에 띈다. 이 동상들은 가톨릭 교회가 열두 사도로부터 이어졌다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회유문 내용을 토대로 세워졌다.

‘십자가의 길’을 나와 걷다 보니 자연스레 김대건 동상이 나타났다. 동상 옆 설치된 순교복자 비와 성인 비는 김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아 1946년에 세워졌다. 소나무 가지 틈새 너머로 비취는 저녁노을과 김대건 신부의 생가 뒷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합덕성당 크램프 신부는 1906년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김 신부의 생가터를 고증했다. 이어 1998년 충남 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되면서, 2004년에 안채가 복원됐다.

솔뫼성지는 승용차 100대와 버스 50대를 수용할 만큼 주차장이 넓고, 주차비·입장료가 없어서 좋다. 개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충남에는 솔뫼성지 외에도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1821~1861) 토마스 신부가 태어난 다락골성지(청양군)와 순교자들이 숱한 박해를 받은 현장인 서산의 해미순교성지, 홍주성지(홍성군), 신리성지(당진시), 배나드리성지(예산군) 등이 있다. 신앙의 자유를 외치다 순교한 김대건 신부, 그리고 그가 걸어온 십자가 길. 그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향기로 마음의 양식을 쌓고 싶다면, 충남 당진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의 내부. ⓒ천지일보(뉴스천지)

◆김대건 안드레아 “천국에서 만나자”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시(현 솔뫼성지 터)에서 태어나 7세까지 살았다. 김 신부는 1836년 모방(Maubant, P)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돼 마카오를 갔다. 그는 마카오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철학과 신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우리나라로 들어오려 했으나 기해박해(1839년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이후 계속되는 탄압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는 1845년 1월 어렵게 한양에 몰래 들어와 국내 사정을 살폈고, 이듬해 4월까지 교우촌(신앙촌)을 차례차례 순방했다. 순교자 집안에서 자란 그가 걸어야 할 길은 뚜렷했다. 그 길이 험난하고 위태로운 여정이었다는 것은 그의 친필 서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을 친필 서한을 통해 솔직하게 담아냈다.

솔뫼성지 내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성당 및 기념관에는 김 신부의 친필 서한들이 전시돼있다. 그가 생전에 쓴 편지 중 19통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념관에 전시된 김 신부의 친필 서한은 원본 크기로 복사돼 전시된 것이다. 친필 서한에는 그가 느낀 걱정과 불안, 서글픔, 그리고 모두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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