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계룡산 국사봉에 오르면 사방으로 계룡산의 능선과 신도안, 너른 평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사진은 국사봉 정상에서 신도안 방향으로 내려다본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 사진은 국사봉 정상에서 서쪽 농토를 내려다본 풍경. ⓒ천지일보(뉴스천지)

국사봉, 나랏일 돌본다는 의미
천지 이치 담은 비석·탑 위치
종교인들 수행 위해 많이 찾아 

계룡산 신도안 명당 요건 갖춰
이성계, 조선 도읍지로 선택도
당시 궁궐 공사했던 흔적 남아

예언서엔 난세 피할 곳으로 기록
신성시 되며 많은 민중종교 모여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해발고도 574.9m의 등산 난이도 하 수준의 계룡산 국사봉. 공부하고 도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의 땀의 향기가 쌓였다는 뜻인 ‘향적(香積)’봉으로 더 잘 알려졌다. 국사봉은 해발고도가 그다지 높지 않고, 등산로의 경치가 뛰어나지 않은 편이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 정상에 오른 후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접하는 사람은 그 감동을 잊을 수 없게 된다.

초겨울인 12월 초 국사봉을 올랐다. 겨울 국사봉 정상은 나무들마저 가지에서 이파리를 모두 떨궈내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논과 밭, 주거들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도록 해줬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산의 높이는 인근 주거들과 밭 상태까지도 볼 수 있게 해줬다. 과연 그 옛날 왕이 이곳에 올라 백성들의 삶을 한눈에 살피고, 하늘을 향해 민생의 풍요로움을 소원하며 국사를 논할 장소로 더할 나위가 없었겠구나.

▲ 계룡산 국사봉 정상에 세워진 천지창운비와 오행비.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창운비와 오행탑이 있는 ‘국사봉’

봉우리에 ‘국사’란 명칭이 많지만 그중 ‘國師(나라의 스승)’가 가장 많다. 이 외에도 장차 나라에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國士’, 기울어진 나라를 통탄한 마음에 생각한다는 ‘國思’, 나랏일을 본다는 ‘國事’ 등 다양한 뜻이 있다. 계룡산의 국사봉은 나랏일을 돌본다는 ‘國事’를 쓴다.

국사봉 정상에는 천지창운비와 오행 탑이 있다. 천지창운비를 덮고 있는 사각지붕 위에는 해달별의 조각이 그려진 흔적이 남아있다. 하늘의 기운이 이 땅에 내려오길 소원한 조상들의 염원이 엿보인다. 비문은 동쪽으로 천계황지(天鷄黃地), 서쪽은 불(佛), 남쪽은 남두육성(南斗六星), 북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새겨져 있다. 오행 탑에는 오(五) 화(火) 취(聚) 일(一)이 기록돼 있다. 이는 천지 이치를 담아내 하늘의 뜻에 닿아 보고자하는 종교인들의 정성이었으리라.

◆민중종교인들의 오랜 기도처 ‘계룡산’

계룡산은 온갖 신이 깃든 곳으로 여겨지며 많은 종교인들이 수행을 하기 위해 찾고 있다. 수행자들은 계룡산 봉우리들을 찾아다니며 도교·불교·무속 등 갖은 신을 찾았다. 그네들의 발걸음과 우리 네 민중종교의 역사가 계룡산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 민중종교의 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영험하다고 알려진 국사봉 인근에는 여러 암자 등 기도처가 많았다. 산길 곳곳에서는 산객들의 소원을 담은 돌탑도 흔했다.
 

▲ 기운이 영험하다고 알려진 국사봉 아래는 작은 암자나 기도처가 많다. 돌무더기를 집채 높이만큼 쌓아 놓은 한 기도처. ⓒ천지일보(뉴스천지)

 

김홍철 교수의 ‘한국신종교대사전’에 따르면 계룡산 신앙은 풍수·도참·비결신앙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계룡산 신도안은 풍수적으로 산맥의 흐름이나 물의 흐름이 명당이 갖춰야 할 모든 요건을 갖춘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좋은 땅과 지기가 쇠한 땅을 고르는 도참설은 그 시원을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본다. 도참사상은 도선국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고려왕조의 국가시책이 되기도 했다.

▲ 계룡산 국사봉 거북바위 아래 수도자들이 제단을 만들고 기도를 위한 향로를 놓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신도안은 이성계(1335~1408)에 얽힌 설화가 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신도안을 새 도읍으로 선택하고 궁궐을 짓다가 멈추게 된 사연이다. 계룡산 사연봉에 올라 제단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다가 하얀 할머니가 공사를 계속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전했단다. 이 계룡산 할머니는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정도령이라는 신인이 나타나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800년간 다스릴 것이니 이성계를 향해 500리 북쪽으로 올라가 도읍을 정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이 할머니의 말을 듣고 공사를 중지시켰고 그때 일군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모여 신털봉이 됐다는 구전 설화가 전해진다.

계룡산 남쪽 마을에 있는 신도안 부남리에는 암석 94기가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된 초석들이 바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도읍지를 신도안으로 정하고 궁궐을 짓다 만 흔적이다. 지금도 그 일대의 지명들이 동문거리, 서문거리 등으로 남아있다.

▲ 등산객들이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들. ⓒ천지일보(뉴스천지)

◆비결신앙으로 수많은 신종교 탄생

이 설화와 비슷한 내용이 민중종교의 비결신앙에서 중요한 책으로 여겨지는 ‘정감록’에도 등장한다. 난세에 피할 곳에 대해 ‘십승지지(十勝之地)’로 묘사하고 있으며, 정도령이 나타나 계룡산에서 새 왕조를 세워 평화로운 낙원 세상을 만든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도참사상이나 비결 책 등을 통해 계룡산은 민중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 됐다. 특히 1860년 동학 창립 이후 많은 민중종교들이 창립됐고, 많은 수가 계룡산에 모여들게 됐다. 그러나 이 민중종교는 국가의 정화작업의 대상이 된다. 1975년 계룡산국립공원 보호관리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40여개의 종교를 공원 밖으로 이주시켰다. 다른 60여개 종교도 이주해갔다. 국가가 이들을 이주시킨 것은 삼군본부를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종교학회가 1985년 조사한 ‘한국 신종교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충남 6.20사업’으로 계룡산을 떠난 60여개의 종교 중 80%가 멀리가지 않고 계룡산 상봉이 보이는 인근 시군으로 이주했다. 도시의 아파트 우선 분양과 당진에 있는 간척지 우선분양을 거절하면서까지 계룡산 인근을 떠나지 못하는 등 아직까지도 민중종교의 정서가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찾아 산에 들어가 수도하며 끊임없이 도를 찾아 헤맨 수도자들의 정성은 오늘도 돌탑 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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