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총총 발걸음의 바쁜 세밑이다. 저녁에 열리는 신문사 오피니언 송년모임에 가는 길에 서울역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역 광장에서 홀로 ‘뎅그랑 뎅그랑’ 울려나는 종소리, 구세군 자선냄비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행렬들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이다. 처음 닥쳐온 강추위 영향일까. 아님 아직도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몸이 움츠려든 탓일까. 한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 서울역 바깥 풍경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차가워 보이기까지 한다.

서부역으로 빠져나오는 계단에서 서편 하늘을 보니 오후 늦으막 겨울햇빛이 순간적으로 너무 강하다. 휑하게 뚫린 거리와 빌딩 사이에서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어도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올 들어 가장 춥다고 하는 한기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다. 역 서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소화아동병원과 코레일빌딩 사이로 넘어가는 저녁해 풍경이 멋있어 폰 사진도 찍었다. 석양의 눈부심과 검붉게 물든 풍경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게 했으니 서울역 동쪽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저녁 5시 조금 넘어 시작된 천지일보사의 ‘고문, 자문, 오피니언 송년모임’은 좋은 분위기속에서 덕담들이 오고간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시기가 시기니만큼 송년회가 제철을 만났건만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들썩이다보니 거의가 조촐하게 이뤄지는 게 올해의 세태다. 천지일보사가 마련한 모임도 올 한해 신문 기고에 고생해준 오피니언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에 맞게 신문사 임직원들이 준비한 행사에는 정성이 담겨져 있었다. 축사와 건배사에서 언론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작지만 강한 신문, ‘빛이 되는 정론’ 천지일보가 되기 위한 치열함이 잔뜩 묻어났다.

어떤 모임에서도 하이라이트가 있는 법이다. 본지에 ‘독도에서 온 편지’를 엮어가는 천숙녀 시인의 ‘…당신은 내게 건강한 인연, 한 치 혹은 두 치씩 성장이 되게 하는 행복한 인연입니다.…(건강한 인연)’는 시가 이날의 만남을 자축한 데 이어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요란법석을 떠는 송년모임이 아닌, 막중한 언론의 역할을 공감하고 천지 공간에 부끄럼이 없는 신문이 되기를 다짐하는 자리인 만큼 인생을 관조하는 노래 몇 곡 듣는 것으로도 흡족한 시간이었다.

김영랑 시인을 좋아하고 조영남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용덕중 팝페라 가수. 그가 요즘 강의와 팝페라로 뜨고 있는데, 듣고 보니 그의 노래엔 열정이 묻어나고 내밀한 호소력이 스며있었다. 나 또한 대중가수니 팝, 오페라 가수는 자주 들어봤지만 ‘팝페라 가수’는 생소하다. 1997년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처음 사용된 팝페라(popera)는 팝과 오페라의 합성어이다. 오페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음악스타일로 대중화한 오페라로 알려지고 있는바, 대중가요를 새로운 스타일로 들어본 용덕중 대표의 ‘모란, 동백’ 노래가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노래를 부르기 전 그는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를 먼저 낭송했고, 이어 조영남가수의 ‘모란, 동백’을 열창했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퍼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1절). 앵콜이 터져 나온 좋은 분위기였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퍼라’는 이 노래 가사가 주는 의미처럼 세상 여정(旅程)은 지금의 우리 사회를 감도는 강물이 되어 구비치고 있다.

사실 이 노래는 가수 조영남이 부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작사, 작곡자와 노래 부른 자는 다르다. 바로 이제하 시인이라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다. 소설가에다 시인, 심지어 화가인 이(李) 시인은 오래 전부터 내가 존경하는 분으로, 그의 제1회 학원문학상(1955년) 수상작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는 1960년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올 만큼 유명했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다.…’로 시작되는 명시였다. 이 시를 그가 고등학생일 때 썼는데, 당시 내가 감명을 받고 애송했던 시이기도 했다.

이제하 시인(1937~)이 김영랑 시인과 작곡가 조두남 선생을 추모해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란 시를 썼다. 그리고선 기타를 치며 직접 노래 불렀으니 그 때가 1998년이었고, 그 노래는 ‘빈들판 CD’에도 담겨져 있다. 똑같은 작시와 작곡의 노래를 가수 조영남이 ‘모란, 동백’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다시 알린 것인데,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던 노래가 대중가수의 목소리를 통해 인기곡이 됐으니 그 원천대로 ‘모란, 동백’은 삶의 희구와 품격이 담겨진 노래다.

팝페라 가수가 부른 그 노래가 천지일보의 오피니언을 위한 송년모임에서 의미와 품격을 더해주었다. 노래가사처럼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프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험한 바람과 고달픔을 녹이기 위한 신문사 임직원과 오피니언들의 새로운 다짐도 함께한 소중한 모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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