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에 닭과 오리 1800만 마리가 살처분됐다. 역대 최대 피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AI가 발생한 일본은 니가타(新潟)현 2개 농장 등에서 닭 55만여 마리, 오리 2만여 마리가 도살 처분된 게 전부다. 비슷한 시점에 같은 AI가 발생했는데도 한국과 일본의 피해 상황이 왜 이토록 다른지를 두고 여러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일본에 비해 한 지역에 농장이 밀집돼 있어 피해가 컸다고 주장했다. 실제 경기 포천의 경우 12건 중 9건(75%)이 3㎞ 이내 지역에서 발생했다. 또 일본은 철새의 AI 바이러스를 농장 가금류로 옮기는 오리가 거의 없어 전파가 느리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부의 대처가 일본보다 늦었다는 것도 변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본은 지난달 21일 철새에서 AI 바이러스가 처음 검출되자 곧바로 위기 경보를 최고 수준으로 올리고 방역 작업을 시작했다. 반면 우리 농식품부는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지 25일이 지난 15일에 AI 위기 경보를 ‘경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심각’으로 상향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매뉴얼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일본은 매뉴얼을 만들어놓고 AI가 발생하면 매뉴얼대로 바로 움직이지만 우리는 여러 절차가 필요해 그런 면에서는 일본보다 늦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부터 강하게 추진했던 일이 ‘규제 철폐’였다.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절차 때문에 비상 시스템을 제때 발동시키지 못한다는 궁색한 변명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AI는 해마다 발생 위험이 있는 만큼 적어도 절차를 이유로 방역이 늦어지는 일이 없도록 시스템을 속히 손질해야 한다. 또 선진시스템도 점검해 매뉴얼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축산농가의 손실과 경제에 미치는 파장, 나아가 국민 보건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적극적이고 엄격한 방역시스템 체계를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매번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관련 부처와 실무자들의 안일한 의식에서 비롯된 변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