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의 비밀문서로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 貞夫)가 1932년 12월 15일 육밀 제489호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根本 莊太郞)에게 하달한 ‘윤봉길 사형집행 명령안’ 표지(오른쪽)와 명령안 문서 ⓒ천지일보(뉴스천지)

윤 의사 친조카 윤주 상임고문으로부터 입수
“사형집행당한 지점에 순국지 표지석 세우는 게 마지막 소망”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본지는 오는 19일 윤봉길(1908. 6. 21~1932. 12. 19) 의사 순국일을 맞아 윤 의사 유해발굴 현장 미공개 3점의 사진과 함께 사형집행명령안 문서사진 2점(표지 포함)을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은 윤 의사 친조카인 윤주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상임고문으로부터 단독 입수했다. 윤주 상임고문은 선친 윤남의(윤봉길 친동생) 선생과 함께 윤봉길의사기념사업을 오랫동안 해오던 중 1993년경 오사카에 거주하던 한일관계 연구가인 신기수씨로부터 유해발굴 사진을 10장 입수했다.

이 중 7장은 2000년 12월 18일에 공개됐고, 나머지 미공개 3장을 이번에 사형집행명령안과 함께 16년 만에 공개하게 된 것이다. 사형집행명령안 역시 처음으로 공개되는 문서다.

▲ 1946년 3월 6일 40여명의 유해발굴대원이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 의사 유해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자 모든 발굴대원들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당시 가나자와 의대생 주정균 학생이 윤봉길 의사의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사형집행명령안은 일본군의 비밀문서로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 貞夫)가 1932년 12월 15일 육밀 제489호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根本 莊太郞)에게 하달한 ‘윤봉길 사형집행 명령안’이다. 일본군 제9사단은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에 주둔했다.

윤 의사는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폭발물 위반 등의 죄목이 적용돼 단심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명령안은 사형집행 나흘을 앞둔 12월 15일 문서로 하달돼 17일 접수됐다. 명령안에는 윤 의사를 ‘죄벌칙위반사건판결서’에 근거해 사형언도를 받았으니 사형을 집행하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사형집행을 위해 윤 의사는 오사카에서 가나자와시로 이동해 하룻밤을 보낸 뒤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육군 작업장 내 서북쪽 골짜기로 이동해 십자가모양 형틀에 양팔이 묶이고 무릎을 꿇은 채로 죽음을 기다렸다. 곧바로 네모토 소타로의 사격 명령에 따라 정사수가 쏜 1발이 미간(양 눈썹 사이 중앙)에 명중돼 윤 의사는 순국했다. 이어 13분 후인 7시 40분 군의관 세가와 요시오(瀨川吉雄)가 절명을 확인한 것으로 보고됐다.

일본군은 윤 의사 사체를 가나자와시 노다산 육군묘지에 인접한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서쪽의 묘지 관리사무소와 쓰레기 소각장 사이 좁은 통로에 평토장으로 암매장했다. 이에 대해 윤주 상임고문은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할 때까지 일본군이 14년간 사체를 짓밟고 다니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며 분개했다

이같이 일본군에게 죽어 영원히 모욕을 당할 뻔한 윤 의사는 해방된 뒤 1946년 초 김구 선생 등에 의한 노력으로 14년 만에 조국에 와서 영원히 잠들게 된다. 김구 선생은 동경에 있는 박열 의사에게 일본에서 순국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봉환을 요청했다.

서상한 발굴단장 등은 가나자와로 가서 1946년 3월 4~5일 이틀간 매장 장소를 조사했으나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입을 다물고 가르쳐주지 않는 등의 비협조로 암장된 윤 의사 매장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할 수 없이 서 단장은 5일 오후 레일을 깔고 밀차를 이용해 이곳 묘지 전체를 파헤치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놀랐는지 일본군 간수였던 시게하라(重原)가 한밤중에 서상한 발굴단장 숙소로 몰래 찾아와서 매장장소를 알려주게 돼 6일 발굴에 성공했다. 유해 발굴 때, 윤 의사가 의거 당시 착용하고 있었던 양복, 구두, 중절모자와 함께 십자가 모양의 목제 형틀도 함께 발굴됐다.

사진은 바로 40여명의 발굴대원이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모습과 찾아낸 뒤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과 당시 가나자와 의대생 주정균 학생이 유골을 수습하는 장면 3컷이다. 사진은 발굴대원 김창률이 촬영했다.

윤 의사를 비롯해 나머지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골도 어렵사리 찾아내 1946년 5월 15일 국내로 봉환해 7월 6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나란히 안장됐다.

이번 공개되는 사진을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윤 의사가 순국한 지 14년 만에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사연을 다시금 되새김으로써 우국충정의 마음을 되새기게 된다.

윤주 상임고문은 “발굴 당시 그 장소가 시영묘지관리사무소와 쓰레기 소각장 사이 좁은 통로에 암매장됐다는 것을 알고 발굴대원 모두가 깜짝 놀랐고, 14년간 짓밟고 다닌 일본의 반인륜적 만행에 분개했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50년간 윤 의사 기념사업을 해왔는데 이제 마지막 소망으로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바로 그 지점에 ‘윤봉길 의사 순국지 표지석’을 세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 일본 가나자와 내 윤봉길 의사가 사형집행 전 마지막으로 구금됐던 구금소의 모습. 그 현장을 방문한 윤주 상임고문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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