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일보(뉴스천지)

1401년 송나라 따라 만든 제도
종묘·사직 관련된 억울함이나
범죄·누명 고발할 때 접수돼

마음대로 치면 오히려 벌 받아
임금의 성밖에 단 하나 있어
지방 백성은 구경도 어려워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둥둥둥~’ 북소리가 도성 안으로 울려 퍼졌다. 어디서 나는 소린가 보았더니 신문고(申聞鼓)에서였다. “내 억울한 사연 좀 들어주소.” 한 남성은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억울한 사연 접수토록 만든 신문고

신문고 제도는 1401년(조선 태종 1년) 처음 만들어졌다. 이 제도는 송나라 법에 따른 것으로, 백성의 억울한 일을 국가가 직접 해결해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태종은 안성학장(安城學長) 윤조(尹慥)와 전좌랑 박전(朴甸) 등이 “송나라 태조가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해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게 한 제도를 본받아 등문고를 설치하소서”라고 올린 소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매달아 신문고를 설치했다.

신문고는 임금의 직속인 의금부당직청(義禁府當直廳)에서 주관했다.

조선 초기에는 상소·고발하는 제도가 법제화돼 있었다. 신문고는 최후의 항고(抗告)·직접고발 시설의 하나였다. 신문고가 울리면, 관리가 직접 나와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도록 했다.

◆마음대로 쳤다간 오히려 큰 벌

당시 신문고는 형식상 조선에서 민의상달(民意上達)의 대표적인 제도였지만, 제한이 있었다.

이서(吏胥: 하급관리)·복례(僕隸: 머슴이나 종)가 그의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한다거나 품관(품계를 지닌 관원), 향리(지방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최하위 관리), 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또는 타인을 매수·사주해 고발하게 하는 자는 오히려 벌을 내렸다.

오직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 해결해 줬다.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처벌 규정이 강했다. 자기 마음대로 쳤다가 오히려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이 같은 신문고의 많은 제약에도 사소한 일까지 사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이 초래됐다. 그 후 신문고 사용 제한이 엄격해졌다.

자손이 조상의 억울함을 대신해 주는 경우, 아내가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거나, 아우가 형을 대신하는 경우, 노비가 주인을 대신하는 경우, 그리고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일 경우에 이용할 수 있었다.

◆백성에겐 너무 먼 이름 ‘신문고’

그러나 실제로 백성들이 신문고를 이용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신문고는 임금이 있는 성 밖에 단 하나만 있다 보니, 지방에 사는 사람은 신문고 구경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

그렇다고 서울에 사는 백성들이 쉽게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신문고 이용자는 주로 서울의 관리들이었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일반 상인(常人)이나 노비,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官民)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고 효용도 없게 됐다.

이용자가 없다보니 연산군 때 이 제도는 폐지됐다. 그러다 1771년(영조 47) 11월에 부활하는 등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