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성지를 가다-인천④] 푸른 눈의 선교사가 지은 인천 최고의 명소 ‘답동성당’
[종교성지를 가다-인천④] 푸른 눈의 선교사가 지은 인천 최고의 명소 ‘답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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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답동성당은 인천시가 지정한 명소 중에 하나다. 7년에 걸쳐 건축된 답동성당은 1897년 완공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성당 가운데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립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19세기 푸른 눈의 선교사들에게 은둔의 나라 조선은 미지의 세계였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고자 했던 선교사들이 희망을 안고 처음 조선에 발을 디딘 곳이 인천이다. 조선이 처음 서구 열강과 마주한 곳이기도 하다.

인천은 개항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등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의 세월을 같이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당시 제물포항(인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고풍스럽고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자태의 이국적인 성당을 지었다. 그곳이 인천 최고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답동성당’이다.

◆웅장한 자태 뽐내는 종교건축물

▲ 답동성당 주보인 성바오로 상

답동성당은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이자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성당을 찾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아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초겨울 12월 초, 답동성당을 찾았다. 전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하차해 2번 출구 방향 지하상가를 지나 신포지하상가 29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답동성당 앞에 이르게 되어 찾아가기가 수월하다. 차량으로는 인천시 중구 답동에 위치한 가톨릭회관 옆 언덕길로 오르면 된다.

역사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도 성당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운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답동성당의 역사를 살펴보자. 1886년 조선과 프랑스 간 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조선에서의 선교가 가능해졌다. 이때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에 처음 신부를 파견했다.

1889년 7월 1일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 신부가 제물포성당(현 답동성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임시로 예배를 드릴 공간을 마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된다.

답동성당은 1889년 설립됐으나 성당이 건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병인박해를 피해 고잔지역에 정착한 민종황(요한) 일가한테 지금의 땅을 싼값에 기증받아 부지를 마련해 성당건축을 계획했다.

제2대 르비엘 신부는 성당 건립 비용을 마련해 경리부 건물 1동을 건립하면서 임시 성당으로 사용한다. 1894년 코스트와 샤르즈뵈프 신부가 성당의 기초 설계도를 그리고 1895년 8월 공사를 착수해 1897년 7월 드디어 답동성당을 완공하게 된다. 당시 종탑은 교회의 상징물이었으나 종이 설치된 것은 성당이 완공된 3년 뒤인 1900년의 일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4대 신부인 드뇌 신부는 성당 증축 공사를 시행해 4년 2개월 만인 1937년 6월 완공했다.

▲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와 스테인드글라스 창. ⓒ천지일보(뉴스천지)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가운데 큰 종탑, 좌우에 작은 종탑이 있다. 팔각형의 받침돌 위에 원형 기둥 8개가 서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돔을 얹은 모습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지어진 성당 가운데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태다.

종탑에 균열이 생겨서 지금은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얼마 전까지 하루 3차례, 오전 6시와 정오, 오후 6시에 종지기가 치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성당 종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일제는 광복 직전 이 성당 3개의 종을 가져가 무기로 만들려고 했다. 성당 측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런데 다른 지역 성당에서 종을 헌납하자 버티기 힘들게 됐다. 당시 성당의 신부는 기발한 제안을 해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신부의 제안은 종을 무기로 만들기보다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태세를 갖추는 용도로 쓰자고 한 것이다. 종은 해방과 함께 무사히 답동성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성당 내부를 들여다보면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다. 들어오는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며 보여주는 빛깔이 아름답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경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과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옆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있다.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세밀하게 묘사된 조각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1937년 6월 30일 축성식이 열리 당시에는 성당에 꼭 있어야 하는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은 없었다. 신자인 장광순(프란치스코)씨는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거금 1000여원(당시 집 열채 값)의 경비를 들여 서양에 14처 조각을 주문했다. 1937년 11월 1일에서야 14처를 부착한 사연도 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개축공사가 있었으나 비교적 옛 모습이 현재까지 보존돼 왔다. 지금도 신자들의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한국 천주교 초기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답동성당이 오랜 시간 보존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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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2016-12-14 11:41:50
인천에 이런 성당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