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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더 이상 수업을 받지 않겠사옵니다.’

‘수업거부’에 대한 한 장의 쪽지.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선생에게 한 장의 쪽지를 남겼다. 그리고 끝내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불의에 참지 못하고 행한 집단시위였다.

오늘날처럼 그때도 그랬다. 유생들은 그릇된 정책, 사회문제 등을 이유로 집단시위를 벌였다.

◆성균관생 모여 해결책 논의

성균관의 유생들은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통해 자체의 내부적인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재회에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의 임원이 있었다. 회장 격인 장의는 동재·서재에서 1인씩 선출해 회의와 제반 업무를 주재시켰다.

6인의 간부도 있었는데, 특정 거실을 사용하며 자치에 관한 업무, 기숙사 운영을 나눠 업무를 맡았다. 모임이 필요할 때는 재회를 소집시켰다.

◆그릇된 정책엔 확실히 의사 표시

유생들은 국가의 그릇된 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사표시를 확실히 했다. 처음에는 상소를 올렸다.

만약 상소를 올려도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식사를 거부하거나, 학생들이 미리 짜고서 다 같이 공부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 ‘권당(捲堂)’이라고 한다.

시위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공부방에 앉아 있기는 하되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이 있었다. 책도 읽지 않고, 스승의 말도 못 들은 체했다. 일종의 ‘침묵시위’로 이를 ‘청맹(靑盲)권당’이라고 했다.

이보다 더 강도가 센 것은 ‘호곡(號哭)권당’이다. 학생들이 단체로 “아이고” 곡을 하며 대궐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권당이 발생하면, 대사성(성균관 정3품)이나 동지관사(성균관 종2품)에게 알렸다. 이들은 유생들을 소집해 그 연유를 묻고 타일렀다. 그래도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런 사정을 상부에 보고했다. 납득할만한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권당은 계속됐다. 반면, 권당의 사안이 적절치 못할 경우 강경책을 썼다.

◆동맹 휴학인 ‘공관’

권당보다 더 강한 게 ‘공관(空館)’이다.

일종의 동맹휴학으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 성균관이 ‘텅텅’ 비게 되는 일이다. 이 경우 사실상 성균관의 기능이 마비됐다.

실제 세종 때 공관 사태가 발생했다. 세종 30년(1448) 문소전(文昭殿, 태조의 비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 서북 빈 땅에 불당을 건립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해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조선은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는데 세종, 세조 등은 왕실에서, 또 개인적으로 불교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것. 이같은 불교에 반대하는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업을 거부하고 공관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대해 세종은 학생들을 국문(鞠問)할 것을 명했다. 세종실록(세종 30년 7월 23일)에 따르면 임금은 유생이 학업을 파하고 간 것에 대해 의군부에 이같이 명했다.

“성균(成均)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과 사부(四部) 생도(生徒)로 나이 20세 이상인 자는 아울러 추국하여 아뢰라.”

하지만 의금부, 의정부, 육조 관원 등의 적극적인 간청으로 국문은 면하게 됐다.

◆승강이 벌이다 다치기도

중종 때도 집단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유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조광조’가 옥에 갇혔을 때다. 성균관 유생들은 상소문을 올려, 왕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유생들의 이런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유생들은 왕에게 직접 항의하기 위해 대궐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군졸은 이들을 막아야 했다. 유생과 군졸이 승강이를 벌이다가 다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이후 유생들의 과격한 집단행동은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그릇된 정책에 대해 성균관 유생들은 함께 집단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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