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여전히 가을을 품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내동성당. ⓒ천지일보(뉴스천지)

국내 최초 성공회 성당 ‘내동성당’
6.25 당시 소실되고 다시 중건
건물 4채와 흰색 예수 성상 있어

한국 감리교의 뿌리 된 ‘내리교회’
아펜젤러, 첫 감리교 예배 봉헌
최초 예배당 건립 등 첫 기록 품어

[천지일보=차은경 기자] ‘최초’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이든지 최초를 디딤돌 삼아 시작하고 발전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사도 마찬가지다. 최초의 선교사, 교회, 목사 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천의 중심부인 중구에는 개신교 ‘최초’의 교회, 성당이 존재한다. 중구 내동에 자리 잡고 있는 내동성공회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다.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있다. 이 최초를 찾아 인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과 겨울이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11월 하순 두툼한 점퍼로 몸을 감싼 채 인천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내동성당이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가서 도착한 내동성당은 여전히 가을을 품고 있었다. 성당 주위의 알록달록한 단풍이 무채색의 성당에 생기를 띠게 했다. 떨어진 낙엽 덕에 걸음을 옮길 때 마다 고요한 성당에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내동성당 입구에 성당을 세운 성공회 코프(고요한) 주교와 선교사 랜디스(남득시)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천 땅 밟은 성공회 코프 주교와 선교사 랜디스

입구에는 성당을 세운 성공회 코프(고요한) 주교와 선교사 랜디스(남득시)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내동성당은 당초 1890년 코프 주교에 의해 지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됐고, 현재의 건물은 1956년에 중건된 것이다. 성당은 1902년에 6개월 간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됐으며, 1904년 제물포해전 당시에는 일본 적십자병원이 설치됐다. 한때는 중학교 건물로 이용되기도 했다.

1890년 9월 29일 영국 해군 군종사제이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코프 주교와 선교사 6명은 인천항에 처음 들어와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코프 주교는 인천에 대지를 마련해 한국의 첫 성당 건축에 착공했다. 이렇게 해서 건축된 제물포 송학동 성당은 1891년 9월 30일 성미카엘성당으로 축성됐다. 한편 랜디스는 1891년 10월 현재의 성당 자리에 성 누가병원을 개설하고, 의료구호사업에 전심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당시 랜디스는 한국의 전통을 존중해 온돌이 있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봤으며 환자이송에 가마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 성 누가병원이 있던 곳에 세운 것으로 1956년 6월 완공했다.

▲ 내동성당의 대성당 뒤편에 있는 흰색 예수의 성상. 예수가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석조 구조물에 목조 지붕의 내동성당

내동성당의 구조는 감사성찬례와 성사 집전에 이용되는 성공회 성당 2채(대성당, 소성당)와 식사 봉사를 위한 성 미카엘 사회복지관 1채, 사제관 1채로 이뤄져 있다. 건물은 외벽과 주요 구조물을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은 중세풍의 석조 구조물이지만, 지붕은 목조로 돼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인 처마를 적용했으며, 창호와 벽체 부분의 처리가 뛰어나다. 대성당 뒤편에는 하얀색 예수의 성상이 있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수가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성상 뒤로 보이는 붉은 빛깔의 단풍과 하얀 성상이 잘 어우러진다.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십자고상, 성수를 담은 성천, 성체를 모시는 성막, 스테인드글라스, 역대 주교들의 초상화, 감사성찬례 집전에 사용되는 제대가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한국의 첫 개신교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한국의 어머니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의 어머니교회’ 감리교 내리교회

내동성당으로부터 불과 100여 미터가 안 되는 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있다. 한국의 첫 개신교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한국의 어머니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골목을 따라 몇 걸음만 옮기면 붉은 벽돌로 쌓아올려진 내리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리교회는 선교 100주년 기념 성전, 아펜젤러 비전센터, 웨슬리 예배당 3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에선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등 대부분의 예배를 진행하고, 십자가형 웨슬리 예배당에선 주일 청년 예배를 진행한다. 비전센터는 지하를 포함해 총 9층의 규모이며, 교회학교의 예배와 청년회 모임에 사용되고 있다.

100주년 기념 성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 감리교 선교의 초석을 다진 내리 초대담임목사 3인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내리교회를 처음 건립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 우리나라 최초의 안수목사인 김기범 목사, 내리교회 제2대 담임 목사인 조지 헤버 존슨(George H. Jones) 목사의 흉상이다.

▲ 내리교회를 처음 건립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 흉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제물포 통해 첫발 내디딘 아펜젤러

내리교회는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최초로 감리교 예배와 찬송을 봉헌한 장소다. 1885년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해 6월 외국인을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감리교 예배를 인도했으며, 7월에는 처음으로 찬송을 봉헌했다. 이를 두고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한국 상공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 찬송”이라며 “한국의 모든 땅이 어서 빨리 이 찬송을 들었으면 한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아펜젤러가 조선에 첫 발을 내딛은 지 6년 만인 1891년 11월, 한국 최초의 감리교 개신교회인 ‘내리교회’ 예배당이 건립됐다. 이는 서울의 최초 감리교회라는 정동교회의 설립보다 약 3달 빠르다.

최초 건립 당시 내리교회는 35.6m²(10.8평) 규모에 외벽에는 석회를 발랐으며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2개의 방 중 작은 방은 12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크기로 예배를 봉헌할 수 있도록 설교단만 둔 단순한 구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교인이 점차 증가하면서 1901년 내동에 옛 교회를 허물고 십자형 붉은 벽돌 고딕양식의 웨슬리 예배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예배장소가 비좁자 1955년 건물을 허물고 예배당을 다시 지었으나 화재로 전소했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당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감리교 최초의 역사를 기록하다

감리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내리교회는 최초의 역사를 하나하나 기록해 갔다. 한국 최초의 예배당 건립에 이어, 1894년에는 최초의 여성전용예배당을 건축했고, 1897년에는 최초의 기독청년회를 조직했다. 1901에는 한국인 최초로 김기범 목사에게 안수했으며, 1907년에는 최초로 예배당 남녀칸막이를 철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많은 한국 최초의 기록들을 품고 있다.

성공회와 개신교의 첫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내리성공회성당과 감리교 내리교회. 선지자들의 흔적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면 황무지 같은 땅에 복음을 전파했던 선지자들의 애타했던 마음도 느껴질 듯하다. 이 겨울, 신앙인이라면 선교의 발자취를 따라 인천 내동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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