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 중심 의료법 첫걸음… 현장 적용 후 수정·보완 작업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보고학습시스템 비(非)전산화
환자안전 인력 배치율 저조

의료분쟁조정 자동개시 요건
사망·의식불명 등으로 제한

[천지일보=강병용·김민아 기자] 6년 전 빈크리스틴(항암제) 투약 오류 사고로 사망한 종현이, 2년 전 예강이와 가수 신해철씨의 사망 사건 등으로 환자안전사고 예방과 대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환자안전법(일명 종현이법)’과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 일명 예강이법·신해철법)’이 시행됐다. 그러나 전담인력의 배치 부족과 좁은 분쟁조정 자동 개시 요건 등이 한계로 지적된다.

◆‘종현이법’ 시행 4개월… 여전히 ‘삐걱’

2010년 항암제 투약오류로 사망한 9살 고(故) 정종현군에 대한 반성으로 지난 7월 29일부터 ‘환자안전법’이 시행됐지만 ‘보고학습시스템’은 여전히 이메일과 팩스로 접수하고 있고, 환자안전 전담인력 배치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안전법은 의료기관 내에서 발생한 환자안전사고를 자율적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인증평가원은 보고된 사례를 분석해 다른 의료기관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의료현장에 주의보를 내리는 ‘보고학습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보고학습시스템’은 아직 전산화되지 않아 현재 인증평가원은 환자안전사고를 이메일과 팩스, 우편을 통해 접수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보고학습시스템 전산화를 위해 2017년 예산안에 32억을 책정해 놨다”며 “법 시행과 동시에 전산시스템을 운영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예산편성을 위해 시스템 구축 계획 등이 필요했다. 내년에 전산시스템 구축을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의료기관이 의무적으로 배치해야 하는 환자안전 전담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환자안전사고를 수집하고 분석·관리·공유하고, 보건의료인과 환자에 대한 교육도 전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무배치 대상 의료기관 959곳 가운데 403곳만 전담인력을 배치했다. 대상 의료기관의 42% 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상급종합병원은 인력 배치를 이미 마쳤지만, 종합병원과 요양병원, 병원 등의 배치율이 각각 64%, 30%, 25%에 그쳐 중소병원으로 갈수록 전담인력 의무를 지키기에 소홀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소병원에서는 간호사 구인난 등을 이유로 전담인력 배치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예강이법’ 시행 첫날 거리로 나선 예강이 엄마

일명 ‘예강이법’ ‘신해철법’으로 불리는 의료분쟁조정법은 지난달 30일부터 시행됐다. 그러나 시행 첫날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예강이 엄마 최윤주(42)씨는 진료기록부 등 의무기록을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수정할 경우 환자가 변경 전·후 기록을 모두 열람할 수 있게 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률안 제정을 촉구하며 길거리로 나섰다.

의료인이 전자의무기록을 수정 또는 변경하기 위해 접속을 하더라도 이러한 접속기록 자료나 변경내용을 별도로 작성하거나 보관하는 것이 의무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개설자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임의로 전자의무기록에 접속해 수정 또는 변경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전직 간호사 출신 A씨는 “실제 의료사고가 일어나면 직원 보호 입장에서 의무기록을 다시 작성하는 일이 발생한다”며 “위에서부터 지시가 내려와 수정이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분쟁조정의 자동 개시 요건이 사망이나 의식불명 등 중대 의료사고에만 적용되는 등 너무 엄격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한민우(33)씨는 지난해 9월 인대 손상으로 인대재건술을 받았는데, 수술과정에서 의사가 신경을 건드려 평생 다리를 절게 됐다. 그러나 한씨의 경우 사망이나 의식불명 등 중대 의료사고가 아니기 때문에 분쟁조정의 자동 개시 요건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 경우 병원 측에서 분쟁조정을 거부하면 긴 기간 많은 돈을 들여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의료계도 의료사고 강제 조정 규정으로 위험한 환자는 의사들의 거부로 더 치료받기 힘들게 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중환자 기피 현상이 발생할 우려가 높고 중환자를 진료하는 일부 진료과목에 대한 기피 현상도 증가돼 결국 이 모든 피해가 국민과 환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시행령 입법예고안 상에는 의료행위 결과 장애 1급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나 발생가능성이 높은 경우 등 고시로 정하는 사항을 자동조정 사유에서 제외키로 했으나 이 문구가 통째로 삭제돼 시행규칙상 이의신청 사유에 대해 당초 법령 시행과 함께 공포될 예정이었던 고시제정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시작이 반’ 시행 자체가 청신호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안전법’과 ‘의료분쟁조정법’ 등 환자 안전과 관련된 법은 시행 이후 1년 이상은 지나야 평가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안 대표는 “의료분쟁조정법의 분쟁조정 자동 개시 요건이 사망이나 1개월 이상의 의식불명이나 장애 등급 1등급 정도로 극히 좁은 범위만 통과가 됐지만, 자동 개시의 길이 열렸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며 “앞으로 1년 동안 시행해 본 후 의사와 피해자 양쪽에 도움이 되면 확대할 수도 있고, 의료사고도 아닌데 남용하는 사례가 많아지면 분쟁조정의 자동 개시 요건이 더욱 좁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환자안전법의 경우 지키지 않았을 경우 과태료 부과나 인사처벌 등의 규정이 없다는 부분은 조금 단점이 될 수 있지만,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나면 의료진이나 환자 가족이 정부에 이를 알리고 의료관이 공유해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환자 안전사고 보고는 의사만 병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환자나 환자 보호자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의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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