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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있던 ‘집값 거품’… 한양선비의 속앓이
장수경 기자  |  jsk21@newscj.com
2016.12.01 09: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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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만주의 집 계약 노정 ⓒ천지일보(뉴스천지)

‘1784 유만주 한양’展 개막
초가집 살다 빚내 100칸집 사
형편 나빠져 1년만에 창동 이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집을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모두 이와 같다면 어떤 사람이 집을 사려고 물어보겠는가?” (8월 6일)

조선시대 서울 남대문 근처 창동에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살았다.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을 자신의 집에서 글을 읽고 쓰며 보낸 유만주. 그는 평생 과거 시험에 매진했지만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인물이었다.

유만주는 1775년부터 1787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4권의 일기를 썼다. 일기는 ‘흠영(欽英)’이라 불렀다. 흠영은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으로 유만주의 자호이기도 하다.

흠영에는 18세기 후반한양의 풍경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담겨져 있었다.

사채로 100칸짜리 집 마련

당시 집을 사던 풍경도 담겨 있어 과거 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갓 서른 살이 된 유만주는 해주의 판관이 된 아버지 덕분에 생활이 좋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사를 하는 기회도 찾아왔다. 원래 살던 창동 집은 초가집이었다. 아버지는 집 근처에서 적당한 것을 얻으라고 했다. 하지만 유만주는 아름다운 정원이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유만주는 1월부터 집주릅(집 흥정을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권하는 창동과 그근처 낙동(駱洞), 수서(水西) 등의 집들을 여러 군데 살펴봤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계약도 번번이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8개월 만에 100칸짜리 명동(明洞) 집을 구했다. 가격은 2000냥. 돈의 일부는 친척에게 빌리고 대부분은 강경상인의 사채를 이용했다.

그가 집을 산 2000냥은 얼마나 되는 돈일까. 한양 최고가 주택의 1/10의 금액이요, 125개월의 생활비였다. 쌀로는 3000말이었다. 이는 8식구가 25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유만주가 비싼 집을 사자, 아버지는 “분수에 맞지 않다”며 취소하라고 계속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유만주는 새집이 좋았다.

   
▲ ‘1784 유만주 한양’展 관람하는 시민들 ⓒ천지일보(뉴스천지)

◆집 비싸게 주고 산 것 뒤늦게 알아

유만주가 집을 구할 때 도움을 받던 집주릅. 그는 집 소개, 거래 알선, 도면 작성, 가격흥정, 매매문서 작성 등에 관여했고, 수수료를 받고 일했다. 보통 거래를 주선할 때 1냥을 받았다. 돈 대신 먹·담배·은어 등 현물을 받기도 했다.

집주릅은 거래 과정에서 농간을 부리며 주도권을 쥐었다. 계약이 성사되기 직전에 집값을 올리기도 했다. 이사 날짜가 잡힌 거래를취소하기도 했다. 또한 집 거래가 되지 않는 것이 유만주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고 자극하기도 했다.

마음에 두고 있던 경희궁 근처의 집 대신 예산을 한참 넘어선 명동의 집을 서둘러 구입하도록 유도한 것도 집주릅이었다. 유만주는 자신의 뜻을 따라 주지 않고 경제적 이득만 노리는 집주릅에 대해 강한 불만과 혐오감을 토로했다. 하지만 거래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직접 화를 내지도 못했다.

유만주는 “하나하나 일을 이해하지 못하니 결국에는 이런 낭패와 황당한 일이 있게 된다”고 했다.

   
▲ ‘1784 유만주 한양’展 관람하는 시민들 ⓒ천지일보(뉴스천지)

◆명동 집으로 이사하다

유만주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이사(8월10~12일)를 강행했다.

첫날인 10일에는 이삿짐 정리를 위해 친구에게 종을 빌렸다. 하인들을 보내 명동 집을 지키게 했다. 둘째 날에는 책장을 옮기고 백부(伯父)인유한병의 ‘효자정려(孝子旌閭)’를 옮겼다. 저녁에는 사당에 절을 하고 이사를 알렸다. 신주는 작은 가마에 봉안하고, 하인에게 지키게 했다. 셋째 날에 드디어 명동 집에 들어갔다. 새사당에 신위를 옮겨 안치하고, 다례를 행했다.

하루 종일 힘들었던 가족들은 모두 위채에 모여 잠을 청했다. 하지만 유만주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집안 곳곳을 두루 살피며 가을달빛을 쳐다봤다.

◆‘창동’으로 다시 이사

“아버지는 값을 내려서라도 집을 팔아 빨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고, 이 집에서 떠난 이후에야 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고 하셨다. 종백에 대한 답서에는 (내가) 일 하는 것이 해괴해 맥맥히 선 채로 보고 있지만, 분에 맞는 집이 아니고 남의 말도 두렵다고 하셨다.” (8월 19일)

“아침에 날씨가 몹시 맑고 환해 명동 집 정원을 거닐었다. 봄에는 꽃달임하기에 좋고 여름에는 피서하기에 좋으며 가을에는 연꽃 보기에 좋고 겨울에는 위로회를 하기에 좋을 것이었다.” (8월 24일)

유만주는 명동 집이 참 좋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1년 밖에 살지 못했다. 아버지 유한준이 파직되고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서다. 결국 다시 창동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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