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성지를 가다-인천②] 순교자의 피로 세워진 ‘갑곶순교성지’… 초기 선교역사를 증언하다
[종교성지를 가다-인천②] 순교자의 피로 세워진 ‘갑곶순교성지’… 초기 선교역사를 증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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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한국 천주교 초기 선교역사의 발자취를 간직한 강화도 갑곶순교성지의 입구. ⓒ천지일보(뉴스천지)

갑곶 해안, 조선 들어오는 경유지 1850년대 신부들 선교 파송 
순교자 박상손·우윤집·최순복 3위비… 박해 증언록 남긴 박순집
누구나 십자가의 길 체험 하도록 다양한 치수 십자가모형 마련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9세기 한국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하게 갈등을 빚은 곳이기도 하다. 또 서양 선교사들이 은둔의 땅 조선을 처음 접한 곳 중에 하나다. 그래서일까, 천주교사와 개신교사의 초기 발자취를 쉽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천주교 선교 초기에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돼 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그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표적인 곳이 ‘갑곶순교성지’다.

가을 정취를 뒤로하고 쌀쌀한 바람에 낙엽이 거리를 가득 메운 11월 중순 성지 탐방지로 갑곶성지를 선택, 발길을 뗐다. 서울·김포와 일산, 인천, 부평 방면에서도 대중교통으로 이곳을 찾을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주차 공간도 넓은 편이다.

▲ 천주교 박해·순교 증언자 ‘박순집의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처절한 순교역사… 갑곶진두의 아픔

우선 갑곶순교성지의 역사를 살펴보자. 강화도 갑곶 해안은 조선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경유지였다. 땅끝 조선에 눈을 뜬 천주교 성직자들이 1850년 중순 강화도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천주 복음이 전국으로 전파된다. 당시 실권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천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때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조선 정부의 책임을 물어 바로 이곳 갑곶 돈대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다. 추후 프랑스군은 후퇴했지만 이로 인해 강화에서는 천주교회의 가장 극심했던 박해의 하나로 기억되는 ‘병인박해’가 시작된다. 갑곶 돈대에서 보이는 바다 건너편의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이 박해로 성연순과 원윤철이 통진에서, 1868년 박상손, 우윤집 등이 강화에서 순교했고, 1879년에는 통진에서 권 바오로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 하나는 1866년에 미국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지는데, 이를 미국이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당하기도 했다.

▲ 순례자들이 십자가를 직접 메고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 프로그램과 예수 행적 14처 등을 순교성지 내 마련해 두었다. 십자가 지신 예수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박순집, 순교자들의 행적 생생히 증언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했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우물터, 야외 제대(제단) 및 예수님상, 야외 미사 장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교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인자한 성모상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앞서 이야기한 순교자 박상순과 우윤집, 최순복의 넋을 기리는 3위비가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곳 순교성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중에 하나가 박순집(1830~1911) 베드로의 묘이다. 인천교구는 2001년 9월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했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당시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로 기록에 남아있다. 박순집 일가도 수난을 피해갈 수 없었으며 16명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남은 생을 하느님께 드리며 일생을 헌신하는데,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가 ‘증언록’을 남긴 것이다. 박순집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알렸다. 천주교 선교 초기 역사와 153명의 순교자 행적을 생생히 증언한 박순집 증언록은 총 3권으로, 현재 절두산순교자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이색체험도 있다. 십자가의 길에는 실제 예수님의 고난을 공감할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고 걸을 수 있게끔 십자가 모형들을 준비해 두었다. 사이즈별로 다 준비가 돼 있어 어린아이들부터 어르신들도 체험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행적 14처를 다 돌고 야외 제대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또 수백 명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넓은 야외 미사 장소(잔디밭)도 마련돼 있다.

복된 소식을 동방의 땅끝 조선에 전파하기 위해 수많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강화도에 들어왔다.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선교사들과 신자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천주교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과 예수를 바라보며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었던 순교자의 정신이 깃든 갑곶순교성지에, 이 시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본다. 

▲ 순교자 박상손·우윤집·최순복의 넋을 기리는 3위비.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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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 2016-11-29 14:52:30
십자가 져보고 싶으면 여기로 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