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도성 주위에 성곽을 쌓았다. 또 동서남북 4대문,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문을 뒀다. 동북쪽에는 홍화문(중종 6년에 혜화문으로 이름 바꿈, 동소문), 동남쪽의 광희문(수구문이라고도 함), 서남쪽의 소덕문(훗날 소의문으로 바꿈, 서소문), 서북쪽의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함) 등이 바로 4소문이다. 4대문의 역할을 도우며, 사람과 도성을 이어 준 4소문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보자.

 

▲ 소의문 전경.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단행본 ‘시민을 위한 서울역사 2000년’)

죄인 벌하던 곳으로 자주 이용
칠패시전도 형성돼 상업 발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이곳에 사소문인 ‘소의문(昭義門)’이 있었다는 걸 누가 알까. 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한 언론사 주차장 모퉁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표지석이 소의문의 흔적을 대신 전해줬다. 하지만 오가는 누구도, 표지석을 인식하지 않았다. 소의문의 모습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듯 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

소의문은 1396년(태조 5년) 다른 성문과 함께 건립됐다. 당시의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이때의 문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인근의 돈의문과 숭례문이 더 큰 관문 역할을 해서인 듯 보인다. 이후 1744년(영조 20년) 8월 문루가 완성되자 소의문으로 개칭했다.

실제로 영조실록(1744년 8월 4일)에는 이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덕문을 속칭 서소문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초루(譙樓, 문루)가 없었다. 금위영에 명하여 초루를 짓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됐다고 보고하므로 이름도 소의문으로 고쳤다.’

그러다 1908년 9월에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일부가 헐렸다.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토목국에서 도로 정비를 위해 소의문 철거 계획을 세웠고, 그해 12월 2일 경매를 진행한 후 철거됐다. 현재는 그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그저 과거 사진을 통해 소의문의 모습을 들여다 볼 뿐이다.

당시 이 문은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로 삼았다.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한 벽돌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했다.

◆광희문과 함께 시신 내가던 문

이 문은 당시 강화군이나 인천군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사소문인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으로 내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죄인을 처형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부터 서소문 밖 300m거리인 지금의 서소문공원 인근에는 죄인의 사형 장소로 자주 이용됐다. 이에 ‘서소문은 참수장(斬首場)’이라는 말이 퍼졌다.

또 서소문 밖으로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었다. 칠패라는 명칭은 우변 포도청의 순라군 중 제7패가 담당했던 데서 유래했다. 칠패에서는 다양한 물건을 팔았는데, 그 중에서도 생선시장으로 유명했다. 당시 이 주변은 상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기도 했다.

◆역사가 남긴 소의문

1624년 이괄의 난(인조 2년, 평안병사 이괄이 일으킨 반란)에 얽힌 스토리도 있다. 

한원군 이목(李穆, 1599∼1624)은 어릴 때부터 무예가 출중했는데,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기관찰사 겸 부원수인 외숙부 이서(李曙)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괄이 한양을 점령했을 때 그는 동향을 살피려고 소의문을 통해 한양에 들어오다가 체포됐다. 이목은 반란군에게 문초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죽임을 당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여발이 소의문에서 아버지가 붙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죽을 때까지 이 길로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오늘날 소의문의 형체는 없지만, 역사는 그 흔적을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주차장에 홀로 남아있는 소의문터 표지석은 좀 더 역사에 귀 기울여주길 바라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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