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비 백성의 마음을 헤아렸던 창덕궁 후원

황치석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소장

창덕궁의 후원은 지형을 자연스럽게 살려 조성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후원은 왕과 세자(세손)의 독서공간이자 휴식공간이며, 사냥과 활쏘기는 물론 무더위를 식히는 피서지이자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고 백성의 고충을 헤아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소요정(逍遙亭)과 취한정(翠寒亭 푸르고 시원한 정자), 어정(御井 왕이 드시던 우물), 옥류천 등이 있다. 청의정은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지붕 정자로 앞 논에서 왕이 친히 모를 심고 수확한 벼로 풍농을 기원하며 지붕을 지어 올렸던 곳이다.

청의정에서 흘러내리는 옥류천 위 작은 돌다리 아래 바닥돌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아래에는 작은 폭포에 물길을 만들어 백성을 향한 왕의 마음을 비유한 인조의 시가 새겨져 있다. 창덕궁 주합루 뒤편 북향의 의두합은 명민하고 문예에 뛰어나 정조가 특히 사랑한 손자 효명세자가 북향의 방(의두합)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독서를 하며 백성의 고통을 헤아렸던 곳이다.

▲ 창덕궁 뽕나무 (제공: 황치석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소장)


연경당은 99칸의 집으로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시절에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짓고 연회를 베푼 곳으로 단청이 없이 소박하다. 지금의 창경궁 춘당지 일원은 전국 11개 지역의 경작지인 내농포(內農圃)가 있고, 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작황을 관찰하는 관풍각이 있었다. 이곳에서 왕은 친경했고 이 부근에서 왕비는 친잠을 했다.

이렇게 창덕궁의 후원과 창경궁은 왕과 왕비, 그리고 다음 세대의 왕이 될 세자와 세손이 백성을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공간들이 조성돼 있어 문화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왕비 친잠례는 궁궐 속 어디에서 거행했을까?

조선의 왕비가 친잠례를 주로 행한 곳은 창덕궁 후원이며,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동궐도(순조 당시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절)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성종실록에 선잠단은 궁의 북쪽에 있고 지세가 좁고 기울어지고 토질이 척박하여 뽕나무도 제대로 자라기 힘들기 때문에 선잠담에서 친잠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원에 채상단을 쌓고 친잠례를 거행했다고 기록돼 있다(성종 8년, 1476).

▲ 서향각 모습 (제공: 황치석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소장)


부용지 동편에 있는 영화당은 임금이 과거시험을 지켜보던 곳이기도 하고, 동편 언덕은 장원봉으로 과거시험을 치러온 유생들이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장원봉에 채상단을 설치하고 왕비가 친잠했다는 기록이 있다(성종 8년, 중종 8년).

영화당에서 바라보는 언덕 위 성균관으로 가는 집춘문 방향에 있는 관덕정 일원에서도 성종의 비 공혜왕후가 친잠한 장소이다(성종 3년, 성종 24년). 영화당에서 관덕정까지는 무과시험인 활쏘기 시험이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장이 설치되어 조망을 바라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성종 8년 이후 300여년 뒤에 영조 43년 1767년에 행한 친잠례(친잠의궤)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복원하지 못한 경복궁 강녕전 동편 옛터에서 행했다. 정조의 비 효의왕후는 창덕궁 후원 규장각 옆 서향각에서 친잠했고, 고종의 비 명성왕후도 북원에서 매년 친잠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순종의 비 순정효황후)도 서향각에서 누에를 치고 수견례를 행한 후 찍은 사진(1911, 1930)이 전해내려 오고 있으며, 1939년까지 어수견식을 한 기록이 있다(동아일보, 1938.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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