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한 강화성당. 겉모습은 사찰양식이지만 내부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공간인 서양식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국내서 가장 오래된 ‘강화성당’
백년된 백두산 적송으로 지어
지금까지도 주일 예배 열려

교인 손으로 지은 ‘온수리성당’
불교 종중해 연꽃 십자가 새겨
과거 사제복·성물·책 전시

[천지일보=차은경 기자] 조선시대 말 인천 강화도는 서구 열강의 빈번한 침략으로 철저히 유린당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역사적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당시 서구 열강은 강화도를 짓밟고 조선왕조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이렇듯 강화도는 수난의 종교역사를 품은 현장이지만 영국 성공회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는 한국에서 초기 선교 거점으로 강화를 택했다.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됐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고종이 조선수사해방학당을 강화도에 설립하면서 영국인을 교수로 초빙했고, 이 덕에 영국 성공회가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를 펼칠 수 있었던 점도 한 몫 했다. 1893년 7월 성공회 워너 신부가 강화 갑곶이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강화도에도 성공회의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 1896년 6월 13일에는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였던 코프 주교가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강화도에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강화성당이 건립되게 됐다.

강화성당은 조금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조선 한옥 구조물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도입했다. 강화도에는 이 성당뿐 아니라 한옥양식을 수용해 지은 성당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온수리 성당이다.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과감한 조합으로 눈길을 끄는 성공회의 성당들을 살피기 위해 강화도를 방문했다.

▲ 강화성당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찰양식의 커다란 범종이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최초로 건립된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성당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30분 남짓 걸린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한 강화성당은 마치 궁궐의 담처럼 돌로 차곡차곡 쌓인 담이 성당을 둘러싸고 있다. 성당의 입구인 솟을삼문 역시 한옥의 빗장문인데, 빛 바랜 태극무늬가 선명하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찰양식의 커다란 범종이 있고 기다랗게 펼쳐진 성당 건물이 보인다. 곱게 펼쳐진 한옥건물 위에 십자가가 달려있는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현재 성당이 자리를 잡은 터는 배 모양으로, 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문에는 태극 문양을 본뜬 원 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성공회 강화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외에도 성당 곳곳에는 한자로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성당 정면부 위쪽 팔작지붕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고 쓰여 있는데, 쉽게 말해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 강화성당의 내부. 서구교회의 건축 전통양식인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 네스트 양식이 혼합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겉모습은 사찰양식, 내부구조는 서양식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겉모습은 영락없는 전통 조선집에 사찰양식이지만 내부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공간인 서양식이라는 점이다. 서구교회의 건축 전통양식인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 네스트 양식을 혼합했다고 한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돌로 만든 커다란 세례대가 보인다. 세례대에 修己(수기), 洗心(세심), 거악(去惡), 작선(作善) 등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으며, 악을 떨쳐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세례대가 중심이 돼 회중석이 양쪽으로 나열돼 있고 앞쪽에는 지성소(제단구역)가 있다.

성당을 지을 당시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고려해 목재는 수령 백년 이상의 백두산 적송을 조마가 신부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해 뗏목으로 운반해 왔다고 한다. 석재와 기화는 강화산을 사용했다. 경복궁을 건축한 목수가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석공과 강화 지역 교우들이 함께해 1년여 만인 1900년에 성당 건축이 완공됐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국가지정 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성당이며 지금까지도 주일에는 예배가 진행된다.

▲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에 위치한 온수리성당. 어떠한 선교단체나 교단의 도움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의 힘으로만 지어졌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연꽃문양 십자가 달린 ‘온수리성당’

여기서 1시간 정도 가면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에 위치한 온수리성당이 있다.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 성당 입구에는 ‘성안드레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지붕 위에는 연꽃문양 십자가가 달려있다. 또 건물 정면 처마 밑에는 연꽃문양의 십자가가 새겨 있는데, 이는 민족토착종교인 불교에 대한 존중과 진흙 연못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성서적 의미를 담았다.

예배당은 이제는 쓰지 않는 건물이지만 깔끔하다. 세월이 느껴지는 난로와 풍금이 자리하고 있다. 한켠에는 초기에 사용됐던 사제복과 성물, 책등이 전시돼 있다.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는 등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됐다.

▲ 온수리성당의 예배당.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평신도들의 힘으로 지어진 최초 성당

온수리성당이 강화성당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어떠한 선교단체나 교단의 도움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의 힘으로만 지어졌다는 점이다. 1897년 대한성공회 의료선교사 로스는 강화 온수리에 진료소를 설치하고 진료사업과 함께 선교사업을 전개했다. 의사 로스의 의료 활동으로 교세가 성장하며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그해 쓰던 성당을 헐고 새로 15간의 성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교인들의 열성과 특별헌금으로 원래 교구가 계획한 규모보다 약 2배가 늘어난 27간의 전통 한옥으로 성당을 만들게 된다.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사제관이 있다. 트롤로프 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해 선교를 시작한지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를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수리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교회가 있다. 푸른 잔디밭 사이로 전통 한옥 양식의 성당과 서양식의 교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온수리성당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성당과 종탑 그리고 한옥사제관이 인천시 지방문화재로 등록됐다.

성공회는 거룩하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믿음의 기초를 성서에 두고 하느님을 믿는다. 영국성공회로부터 1890년 선교된 대한성공회는 2016년 현재 12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약 1억명의 신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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