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도성 주위에 성곽을 쌓았다. 또 동서남북 4대문,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문을 뒀다. 동북쪽에는 홍화문(중종 6년에 혜화문으로 이름 바꿈, 동소문), 동남쪽의 광희문(수구문이라고도 함), 서남쪽의 소덕문(훗날 소의문으로 바꿈, 서소문), 서북쪽의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함) 등이 바로 4소문이다. 4대문의 역할을 도우며, 사람과 도성을 이어 준 4소문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보자.

 

▲ 인조반정의 역사적 무대 창의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쪽으로는 인왕산, 동쪽으로는 북악산과 이어지는 이곳, 바로 창의문(彰義門)이다. 한양 서쪽 절경을 품고 있어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울긋불긋 단풍들이 창의문의 고즈넉함을 더한다. 이렇듯 자연의 보호를 받으며 긴 시간 자리를 버텨온 창의문. 사대문인 숙정문처럼, 오랜 시간 베일에 감춰졌다 이제야 공개된 듯한 느낌이었다.

창의문은 1396년(태조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창의문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고,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인 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불렀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해 열어주도록 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 창의문 아래를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 갖춰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갖추고 있다. 또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돼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또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아치형 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인조반정’ 때 뚫고 들어온 문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이라는 창의문의 뜻은 마치 인조반정을 예견한 듯하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서인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붕당에 관계없이 좋은 정치를 펼치고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임해군과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서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보인다. 이를 빌미로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삼았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려고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했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 창의문 천장 봉황 ⓒ천지일보(뉴스천지)

◆1.21사태 발생한 곳

창의문은 1.21사태가 터진 곳이기도 하다. 1968년 북한에서 31명의 무장공비가 완전무장을 하고 청와대를 급습했다. 이들은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해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난다.

이들은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또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이들의 침투 목적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신조만 유일하게 생포됐으며, 나머지 28명은 사살, 2명이 탈주함으로써 사건이 막을 내렸다.

창의문에서 보면 저 멀리 자연 안에 담긴 도심이 내려다보인다. 그 옛날 선비들도 이곳에 서서 한양 도성의 아름다움을 느꼈겠지. 절로 미소 지었을 모습이 눈에 아른아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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