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한국교회 대표 연합기구 한기총‧한교연이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이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설립 당시부터 정권과 하나 돼 움직였던 한국교회가 대통령이 힘을 잃자 일찌감치 새로운 권력을 찾아 나선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고(故) 최태민 목사로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남다른 인연을 조명하고 한기총 등의 최근 행보를 정리했다.

[정치와 교회②-정교분리 아닌 공생의 길]

한기총 탄생에 5공화국 안기부 입김 작용설 유력
출발부터 정치와 공생 “정권 옹호할 세력결집 목적”
친정부 행보 이어오다, 최근 대통령 힘 잃자 등 돌려
한기총 주축 장로교, 일제 때는 신사참배로 목숨 부지

[천지일보=명승일 기자] 보수 개신교를 대변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전까지는 박근혜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왔다. 현 정부 들어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등 쟁점 현안이 있을 때마다 환영한다고 밝혀왔다. 한기총은 박근혜 정권뿐만 아니라 역대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우군’을 자처했다. 한기총의 이런 구애에 화답이라도 하듯, 정치인이 교회 지도자를 예방하는 모습도 그리 낯설지 않게 됐다. 여야 대표와 정부 부처 수장 등이 개신교 한기총을 예방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로 굳어졌다. 이 같은 한기총의 친(親)정부 행태는 그 태생과 결코 무관치 않다. 한기총은 그 목적 자체가 정치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헌법 제20조 2항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조항조차 무색하게 한다.

우선 한기총의 창립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기총 홈페이지의 설립 취지문(정관 전문)을 보면, ‘범 교단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모든 교단을 하나로 묶어 정부나 사회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자는 데 합의했다. 1989년 4월 28일 한경직 목사 외 300여명이 서울 영락교회 선교관에서 창립 준비위원회 총회를 가졌다’고 명시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으면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데 일체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이후 같은 해 11월 29일 각 교단과 단체의 파송 대표 연석회의를 개최해 창립총회 장소와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12월 28일 서울 강남침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 36개 교단과 6개 단체에서 대표 121명이 참여해 한기총이 탄생했다.

하지만 한기총은 탄생 때부터 한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정치적 목적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정부는 진보 개신교 교단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견제하기 위한 세력이 필요했다. 이에 정부는 1989년 12월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보수 교단 협의체인 한기총을 창설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제5공화국 당시 문건이 한기총의 설립에 정치적인 외부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에 힘을 더한다. ‘뉴스앤조이’ 등은 한기총에 대해 제5공화국 세력이 진보적 종교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운영한 종교대책반의 작품이라고 보도했다. 국정원과거사진실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오충일 목사도 지난 2005년 4월 인터넷언론인 포럼에서 안기부 종교담당 요원이 한기총 창립에 구체적으로 개입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주최한 제140차 월례포럼에서 남오성 목사(당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는 “당시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5공화국 세력이 진보적 종교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종교대책반을 운영하고 보수세력의 조직화를 지원했다”며 한기총 탄생 배경에 정치공작이 개입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기총은 한국교회 구성원으로부터 위임받지 않은 대표성을 무단 발휘해 왔다. 복음단체를 가장한 정치단체”라고 일침을 가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4년 3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46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대표적인 정교유착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출처: 뉴시스)

이처럼 한기총은 출발부터 정치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들을 옹호하며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보폭을 넓혀왔다.

한기총의 정치성은 탄생 전부터 예고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기총을 설립한 인사들이 전두환 군부세력을 찬양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지난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 성결교 증경총회장 정진경 목사(신촌성결교회)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기도에서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 “온 국민이 바라는 남북통일과 국가의 번영 그리고 민주화실현에 크게 공헌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이후 당시 조찬기도회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한기총 설립을 견인했다. 한경직 목사가 한기총 최초 대표회장을 맡았고 정진경·조향록 목사 등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정 목사는 한기총 2대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한기총의 정치적 성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기총을 주로 구성하는 교단인 장로교를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정치성을 지향하는 DNA가 내재해 있다. 현재 한기총에는 76개 교단·17개 단체(행정보류 및 회원권 제한 교단·단체 포함)가 가입돼 있다. 행정보류 및 회원권 제한 교단을 제외하더라도 55개 교단이 장로교로 구성됐다. 그만큼 장로교가 한기총을 핵심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다. 그러나 장로교는 일제강점기 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 즉, 신사에 참배한 오점을 안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지난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가결했다. 여기에는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장로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고신파(高神派)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사한 목회자와 신도 50여명은 해방 이후 감옥에서 나와 고신파를 만들어 독립했다.

▲ 1938년 9월 12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사참배 모습.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평양신사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고 있다. (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캡처)

신사참배로 분열을 겪은 장로교는 신학 방법론의 문제로 또다시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로 나뉘었다. 또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놓고 용공(容共)시비가 일어 통합(統合)예수교장로회와 합동(合同)예장과의 분립이 1959년에 진행됐다. 게다가 한기총은 출범 이후 이단논쟁과 비리로 논란이 지속됐다. 결국 2012년 한교연(한국교회연합) 분리, 2013년 고신 탈퇴, 2014년 예장합동 탈퇴 등 개신교 연합체로서의 위상은 한없이 낮아졌다.

한국교회를 하나로 만든다는 취지와 달리, 한기총은 편향된 정치적 행보 등으로 얼룩졌다. 급기야 지난 2011년 ‘한기총 해체를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가 발족했고, 이들은 ‘부패한 한기총이 한국교회의 복음화를 막는다’며 해체를 부르짖었다. 기독인 네트워크는 “한기총은 기독교를 빙자해 편향되고 폐쇄적인 특정정치 이념만을 추구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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