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도성 주위에 성곽을 쌓았다. 또 동서남북 4대문,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문을 뒀다. 동북쪽에는 홍화문(중종 6년에 혜화문으로 이름 바꿈, 동소문), 동남쪽의 광희문(수구문이라고도 함), 서남쪽의 소덕문(훗날 소의문으로 바꿈, 서소문), 서북쪽의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함) 등이 바로 4소문이다. 4대문의 역할을 도우며, 사람과 도성을 이어 준 4소문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보자.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광희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가면 작은 성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광희문(光熙門)이다. 아담한 크기의 성문. 일반인도 쉽게 오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다. 성문 안에서 크기를 재보니 성인 여성 걸음으로 14폭 정도였다. 과연 한양 도성의 사소문 (四小門)이라는 게 느껴졌다.

◆조선시대 4소문 중 하나

1396년(태조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된 광희문은 조선시대 성문 중 하나다. 1422년(세종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 손방(巽方)에 위치하며 도성의 청계천 물이 이곳으로 빠져나가므로 수구문이라 했다. 또 서소문과 함께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나가는 문이므로 시구문이라고 불렀다.

‘광희(光熙)’란 광명을 뜻하지만 조선왕조 마지막 연호인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앞뒤 글자를 합한 것과 같아 이것이 시체처럼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조선왕조 종말을 뜻한다고 풀이하기도 했다고 한다.

숙종실록(1711년)에 따르면 민진후가 광희문을 고쳐 쌓으며, 문루를 건설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이때 마련한 목재는 돈의문에 사용됐다. 이어 1719년(숙종 45년) 1월 25일에 민진후가 “국초(國初)에 도성을 쌓은 뒤 문루를 모두 세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다 1928년에 자금 부족으로 관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혜화문과 함께 총독부에서 문루를 철거했다. 1975년 11월 김응현이 쓴 현판을 달고 복원됐는데, 이는 퇴계로 확장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해 복원됐다. 이때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39년 만인 2014년 2월 17일부터 연중무휴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 광희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시체 성 밖 내보내던 문

옛날에 서울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이 문으로 내가서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쪽으로 운반해 매장했으므로, 속칭 시구문이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하기도 했다. 결국 양반은 물론 일반 사람도 이 문으로 다니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도성의 모든 하수 모여드는 곳, 조그만 바위 구멍 광희문이네. 사람의 혈맥 같은 수많은 개천 밤낮으로 이곳을 새어나가고 똥오줌이 바다로 빠져나가니 인분 실은 우마차 꼬리를 무네. 천연으로 본디가 펀펀하던 곳, 어찌하여 패고 언덕이 졌나. 겹쌓여 옴딱지가 떨어져 나오고 덩이덩이 떡 만두 널려 있는데, 가끔 나무에도 걸려 있어 고약한 비린내가 물씬 풍기네.’

이처럼 사소문인 광희문도 조선시대에 제 역할이 뚜렷했다.

현재 광희문 위쪽 언덕으로는 한양도성 성곽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양도성의 규모가 얼만했을 지 제법 가늠이 간다. 도중마다 성곽이 끊겨 느낌으로 길을 따라가야 한다. 이렇듯 오늘날 한양도성을 느낄 수 있는 건, 성문이 있어서다. 그 소중함을 가슴 깊이 깨달아야할 시기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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