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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자릿조반으로 올린 타락죽
젖소 없어 어미소 젖 모아 우유 보급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전하, 자릿조반 잡수시옵소서.”

왕이 아침에 일어나면 상궁은 죽 한 그릇을 왕에게 올렸다. “타락죽이구나, 참 고소하다.” 왕은 잠자리에서 그릇에 담긴 타락죽을 깨끗이 비웠다.

◆왕, 아침에 잠자리서 타락죽 한 그릇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임금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바로 이른 아침을 올리는데, 이를 ‘초조반(初朝飯)’ 또는 ‘자릿조반’이라 불렀다.

그중 타락죽은 자릿조반에 자주 올라갔던 음식이었다. ‘타락(駝酪)’은 우유를 말하는 것으로, 곱게 갈아 놓은 찹쌀가루에 물을 붓고 끓이다가 우유를 넣어 만든 죽이다. 타락죽은 궁중에서 10월부터 보양식으로 먹었다. 궁중에서는 암소의 젖을 약처럼 사용했고, 임금이 병이 나거나 몸이 약할 때 보양식으로 올렸다. 어린이나 환자에게 영양식으로 좋은 음식이었다.

‘동국세시기’에는 “궁중 내의원에서는 음력 시월 초하루부터 정월까지 왕에게 타락죽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보양음식이므로 소주방(燒廚房, 왕의 식사를 담당하던 곳)에서 끓이지 않고 내의원에서 쑤어 임금께 올렸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인종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여러 신하들이 우유로 만든 타락죽을 영양식으로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조도 겨울철이면 늘 우유죽을 먹고 힘을 내어 체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고종은 재위 말년을 빼놓고 거의 매년 타락죽을 즐겼다. 타락죽을 매우 좋아해 우유를 제때 준비하지 못한 관리를 크게 벌하려고도 했다고 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앵도창(櫻桃瘡)이라고 해 목 위에 앵두만한 창이 생기면 날마다 우유를 마시면 저절로 낫는다고 했다. ‘증류본초’에는 대맥초 한 근과 백복령 가루 4냥을 생우유에 개어 먹으면 백일 동안 배가 고프지 않아 구황에 도움을 준다고 적혀 있다.

◆젖소 아닌 어미소 젖 모아 임금께 진상

타락죽에 들어간 우유는 언제부터 사용된 걸까.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문헌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유우소(乳牛所)가 있었고 낙수(酪酥)를 가공해 상류층 일부에서 식용으로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이 우유를 먹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낙산에 목장을 지어 우유를 보급하도록 했다. 지금과 다른 게 있다면, 당시에는 우리나라에는 젖소가 없었다. 즉 젖소가 아니라 새끼를 낳은 어미소의 젖을 모아서 만들어 진상했다.

이렇다 보니 어미의 젖을 먹어야 할 송아지가 굶는 상황도 발생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농업생산력의 핵심인 황소와 그 주인인 농부가 고통을 함께 나눠야만 했다.

실제로 1770년 1월 25일 영조는 봄갈이가 멀지 않은 1월, 신하에게 타락죽을 금지하고, 그 어미소도 송아지와 함께 놓아주라고 명한다.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농사에 의지하는데, 농사에 가장 긴요한 것은 소이다.”

양반들이 점점 사치가 심해져 우유를 함부로 마시는 일이 많아지자, 세종대왕은 사치를 막기 위해 목장을 폐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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