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 푸른 물을 사흘간 붉게 물들게 한 격전
북한군 1개 사단 궤멸..북의 '3일 작전' 수포로

※편집자주 = 올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은 엄청난 상처만 안겨준 민족상잔이었다. 인적, 물적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전사자 5만8천809명을 포함해 부상 또는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혀간 국군 피해자만 31만9천759명에 이른다.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대표적 전투현장 7곳을 둘러본다. 춘천전투, 오산전투,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지평리전투, 현리전투, 백마고지전투 등이다. 전쟁의 참상을 되돌아봄으로써 역설적이지만,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하는 취지에서다.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낸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목적의 하나다.

(춘천=연합뉴스) 6.25가 발발한 지 60년이 흐른 지금 소양강에는 전쟁의 참상을 모두 잊은 듯 푸른 물결만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다만, 60년간 소양강의 남과 북을 잇는 소양 1교의 교각에 남은 총탄 자국만이 당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춘천대첩. 6·25 전쟁 초기 중동부전선에 위치한 국군 제6사단이 춘천 소양강, 봉의산 일대에서 사흘간 치른 방어전투이다.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2군단 2사단과 12사단을 맞아 거둔 첫 승전이기도 하다. 이 전투로 춘천, 수원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3일 작전'은 좌절됐다.

국군은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을 이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국군은 이 승리로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증원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민국을 구한 춘천대첩이 6.25 전사(戰史)에서 중요한 전투로 재조명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당시 사단장인 김종오 대령이 이끈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 화기소대 일등병으로 전투에 참가한 춘천전투 생존자 안원흥(80) 씨와 함께 전쟁 초기 전세를 뒤바꾼 춘천대첩의 주요 격전지를 둘러봤다.

◇개전 초기 무너진 軍..심일 소위의 '육탄 신화'로 부활 = 1949년 7월 열아홉 살의 나이로 국군에 입대해 6사단 7연대에 배속된 안 씨는 군 복무 1년 만에 6·25 전쟁을 맞았다.

당시 안 씨는 춘천 발산리 일대에서 38선 경비를 담당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북한의 남침전쟁을 경험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이자 역사의 산증인이다.

안 씨는 "새벽녘 북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포성이 점차 커지더니 포탄이 38선을 넘어 후방 쪽에 비 오듯 떨어졌다"라며 "포격 피해는 오히려 38선 경비부대보다 후방의 아군 진지가 더 컸다"고 전쟁 초기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짙은 안개를 뚫고 불을 뿜기 시작한 포화는 한동안 계속됐고, 춘천 고탄리 일대에서 탱크를 앞세워 남하한 북한군에 의해 38선은 힘없이 무너졌다"며 "내가 속한 중대도 본대와의 통신이 끊겨 고립됐고, 합류 과정에서 무수한 전우가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라고 개전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회고했다.

춘천 신북읍 여우고개 일대까지 퇴각했던 7연대의 반격은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이었던 심일(육사 8기) 소위로부터 시작됐다고 안 씨는 전했다.

그는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일명 '옥산포'(춘천 사농동 신매대교) 도로변 소나무 숲에 매복한 심 소위와 5명의 특공대가 수류탄과 화염병만으로 북한군의 자주포 3대를 파괴했다는 소식을 소양강 퇴각 이후 전해 들었다"라며 "심 소위가 거둔 혁혁한 전공에 전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안 씨는 전했다.

당시 이 작전으로 심 소위와 육탄 5 용사는 6.25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신화가 됐고,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춘천대첩의 원동력이 됐다.

"'자주포 킬러'라는 심일 소위의 별명이 이때 얻어진 것"이라고 안 씨는 힘주어 말했다.

"이를 계기로 7연대는 춘천 신동면과 옥산포 일대에서 소양강 도하 직전까지 집중 포격을 가했고 북한군의 공세는 멈칫했다"는 게 안 씨의 증언이다.

그때의 전투 상황에 대해 안 씨는 "아군의 포는 고작 105㎜ 포와 박격포가 전부였지만 밀집대형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향해 집중 포격을 가했다"며 "포연 자욱한 소양강 너머로 북한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결국, 북한군 2사단 전력의 40%를 무력화시킨 이날 전공으로 소양강 1차 방어는 물론 그 사이 주민들이 무사히 소양강 이남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 "소양강을 사수하라"..사흘간의 최후 방어전 = 북한군의 소양강 남하를 저지하려고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최후 방어전은 6월 27일 오후까지 사흘 밤낮 계속됐다.

이때 6사단 지휘부는 소양강 방어선과 북한군이 집결한 우두 벌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을 구사하고자 춘천 봉의산 정상을 지휘본부로 낙점했다.

당시 지휘본부 아래 춘천 소양 1교 인근 진지에 배치된 안 씨는 "북한군은 개전 당일 춘천까지 점령하라는 명령 수행을 위해 무모할 정도로 소양강으로 몰려들었지만, 아군의 집중 포격으로 우두 벌판과 소양강변은 북한군 시체로 뒤덮였다"고 전했다.

또한, 소양강 방어선 전투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 경찰 등 민.관.군이 힘을 합쳐 결사항전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안 씨는 강조했다.

주민 지종호(78. 당시 17세) 씨는 "사흘 밤낮으로 펼쳐진 공방전 당시 아낙들은 주먹밥을 만들고 시민과 학생은 포탄을 방어진지로 나르는 등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웠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전투에 학생으로 투입됐던 유성영(80. 당시 19세) 씨는 "봉의산에서 아군이 쏜 57㎜ 대전차포탄(직사)이 북한군 자주포를 잇달아 명중시켜 고꾸라지게 한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증언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어린 학생들은 수개월 뒤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해, 군번 없는 용사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산화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결국, 사흘간의 공방전에서 6사단은 북한군 병력 6천500명을 사살하고 자주포 18대를 파괴했다. 반면 아군 피해는 전사 200명, 부상 350명에 불과했다.

안 씨는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궤멸하면서 흘린 핏물이 소양강 푸른 물을 사흘간 붉게 물들였다"라며 "60년이 흐른 지금도 소양강에 노을이 붉게 질 때면 당시의 격렬했던 전투가 떠오른다"고 술회했다.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춘천 근화동 둑 일대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돼 이곳이 옛날 춘천대첩의 격전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소양 1교의 교각에는 총탄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어 60년 전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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