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 있는 단군성전.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제 올린 사직단의 단군성전

상고~현대 각 시대 위패 모셔
시대 바껴도 정신 하나란 의미
단군상 주위에 봉황·토끼 문양 

앞마당 방향 따라 꽃·나무 심어
전국 200곳 넘게 단군상 모셔져

“단군 통치 이념인 홍익인간
현시대 인류 공영에 도움 돼”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이 사우는 우리 겨레의 시조되시는 단군 할아버님을 모신 성역입니다. 그 이름을 단군성전 또는 백악전이라고 부릅니다. (단군성전 안내문 중)’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우고 하늘을 향해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 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 등을 지낸 사직단 옆에 국조 단군을 모신 단군성전이 있다.

민족 신앙의 근간이 되는 단군상과 우리민족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위패를 모셔놓은 독특한 곳이다. 단군상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상고시대부터 고조선,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상징하는 위패가 늘어섰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우리 민족의 정신은 하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정한 사람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일반적인 사당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름도 빛도 없이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이 된 무고자를 위한 위패도 있었다.

 

▲ 단군성전 내 모셔진 국내 최초 국민경모 단군소상. ⓒ천지일보(뉴스천지)

국민경모 단군상 주위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봉황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토끼 등이 장식장의 문양으로 새겨졌다. 단군왕검도 토끼띠다.

단군성전 앞마당 좌우에는 여러 나무가 심겨져 있다. 관리 측에 따르면 이 나무들도 의미가 있단다. 북서쪽을 의미하는 오른편에는 당초 맨드라미나 백일홍 등 토종 나무가 아닌 것들이 심겨져 있었고, 동남쪽에는 은행과 측백 등 토종 서식종이 심겨져 있었다고 한다.

전국에 종교와 상관없이 설치된 단군성전은 65곳이다. 종교인들이 존중하는 의미에서 단군상을 모신 것까지 따지면 200여곳은 족히 넘는다는 관리 측의 설명이다.

㈔현정회 이건봉 이사장은 단군성전에 대해 “이곳은 5000년 이어온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기려야 할 분들을 전부 모셔놓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단군의 통치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에서 이화세계는 원래 제세이화이다. 홍익인간이라는 통치 이념으로 인본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현 시대는 다문화사회이고 배달시대 때보다 각국이 더 가까워졌다. 이럴수록 지구가 하나라는 인류 공영 세계 평화를 위해 많은 종교 등 훌륭한 사상이 있지만 홍익인간이 인류 공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익인간은 대한민국은 헌법에도 명시될 정도로 우리 민족의 근간이 되고 있다.
 

▲ 교과서 등에 인용되는 표준 단군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강점기와 단군성전

일제강점기 을사늑약과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일제는 나라의 큰 제사인 봉선제를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5000여년간 이어오던 역대왕조의 단군제사가 끊어졌다.

이 때 태조 이성계의 능인 ‘동구능’ 참봉이었던 이한철옹이 충남 천안시 북면 오동 봉황산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제단을 쌓고 숨어서 인근 지인들과 봉선제를 지내며 3.1 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곳은 3.1운동의 근거지인 아우내 장터가 있는 곳이다.

1945년 광복 후 이한철옹의 딸 모선 이숙봉 여사를 중심으로 성루 남산의 조선신사를 허물고 제단을 쌓아 국조단군, 사직대제를 봉행했으나 6.25전쟁으로 봉황산으로 칩거해 명맥을 유지했다. 전쟁 중에도 봉황산에서 풀잎으로 제기그릇을 만들어 봉선제를 지내며 명맥을 유지했다. 휴전 후에는 상경해 서울 남산에서 봉행하기 시작했다.

▲ 시대별 창업주 위패.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는 서울 사직단을 공원화하면서 일본절을 짓고 일본조상을 모셨다. 이를 이숙봉 여사가 이희수 이정봉 두 여사와 함께 사직단 안의 일본 불교의 원류가 유가밀교라는 것을 고증했다. 이에 호국불교인 천화불교를 개창해 국조 단군왕검과 사직신, 역대 창업주, 순국 선열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이숙봉 여사가 사직공원 일우의 일제강점기 때 세운 일본절 및 무허가 건물을 자비로 구입했다. 이후 세 여사와 함께 역사학자, 종교인들이 동양철학가 등 인사들이 참여해 봄·가을 봉선제(어천절 개천절 대제전)를 민관합동으로 드리기 시작해 54년째 봉행하고 있다.

단군성전은 이듬해인 1961년 건물을 개축해 1968년 완성됐다. 단군성전이 지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단군전 및 사직기념관 건립에는 무려 9년이 소요됐다. 담장이 8차례 헐리고 단군성전도 7~8차 만에 건립되고, 단군성상도 3번이나 조성됐다. 일부 개신교인들의 반대에 몸살을 앓기도 했다. 단군성전에는 단군소상(대한민국 최초의 정부지정 국민경모상), 사직신상, 우리 민족의 역대 창업주 위패가 안치됐다.

1967년 8월 서울시에 기부체납하기 위한 성전관리단체인 현정회가 결성됐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으로부터 대지 사용 허가를 받고 10월 건축허가를 받아 1968년 9월 3일 단군전 및 사직기념관 낙성식을 거행했다. 1968년 8월 24일 단군성전은 국가에 기부체납 됐다.

▲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를 조각한 조각상이 제단 아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다시 보는 단군신화

국조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중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서 등장한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지상을 살피니 삼위태백산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다고 보여 천부인 3개와 무리 삼천명을 주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내려가게 했다. 환웅은 신단수 및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하고 바람, 구름, 비를 관장하는 풍백과 비우사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 인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두루 맡아보며 다스렸다.

이때 굴속에 함께 살고 있던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빌었다.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를 지켜 삼칠일(21일)만에 여자가 됐고, 호랑이는 지키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결혼할 사람이 없어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와 혼인해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왕검이었고, 단군왕검은 성장해 아사달을 도읍으로 고조선을 세웠다. 이때가 기원전 233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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