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도성 주위에 성곽이 쌓았다. 또 동서남북 4대문,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문을 뒀다. 동북쪽에는홍화문(중종 6년에 혜화문으로 이름 바꿈, 동소문), 동남쪽의 광희문(수구문이라고도 함), 서남쪽의 소덕문(훗날 소의문으로 바꿈, 서소문), 서북쪽의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함) 등이 바로 4소문이다. 4대문의 역할을 도우며, 사람과 도성을 이어 준 4소문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보자.

 

▲ 길 건너편 언덕에서 바라본 혜화문 전경ⓒ천지일보(뉴스천지)

성곽길 이어져 사람 통행 자유로우나
역사 속 ‘동소문’ 아냐… 모양만 엇비슷
도로 탓에 원래 위치보다 옆쪽에 복원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성북구 한성대입구역 부근 도로변. 성문 하나가 홀로 서 있었다. ‘혜화문(惠化門)’이다. 한양 도심을 지킨 사대문과 함께 세워진 4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 서울 성곽길과 이어져, 오가는 사람의 통행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서글픔이 밀려왔다. 역사 속 성문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서다. 그저 모양만 엇비슷했다. 위치도 제자리가 아니었다.

전경을 보기 위해 오른 도로 건너편의 높은 언덕. 주변에 설치된 전봇대 전선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혜화문도 제 모습으로 다시 지어지길 바랐을 텐데, 왜 이런 모습이 됐을까. 그저 마음이 미어졌다.

▲ 혜화문 천장에 새겨진 봉황. ⓒ천지일보(뉴스천지)

◆‘홍화’에서 ‘혜화’로 개칭

‘혜화문’은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던 조선시대 성문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년)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소문(小門) 중 동문과 북문 사이에 있어, ‘동소문(東小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본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다. 하지만 1483년(성종 1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이 ‘홍화(弘化)’라고 정해지면서 혼동을 피하고자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문루가 불타 성문만 있던 것을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세워 보존해 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문루가 헐리고 석문만 남게 됐다.

그러다 1939년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이 생기면서 헐려 흔적조차 없어졌다. 혜화문이 새로 복원된 건 1992년이다. 하지만 제 위치가 아니었다. 이 문이 원래 있던 곳에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 혜화문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양주·포천 방면 중요 출입구

4소문인 혜화문의 역할은 중요했다. 먼저 양주와 포천 방면으로 통행하는 출입구였다.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숙정문(북대문)이 폐쇄됐는데, 이를 대신해 창의문과 혜화문이 북문(北門) 역할을 했다. 실제로 출직호군(出直護軍, 문을 지키는 병사)이 소문은 20명이고 대문은 30명이지만, 혜화문은 30명이었다. 숙정문의 일반인 통행이 금지됐기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행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했다.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1월 22일 동지(同知) 이천구(李天球)는 이곳의 성곽이 꽤 높다는 점을 파악해 도성을 방어하는 방법의 상소를 올렸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도성은 하도 넓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 지형을 헤아려보고 험조(險阻)함을 따져 보면 실로 넓은 데 대한 우려는 없습니다. 돈의문(敦義門)에서 북쪽으로 동소문(東小門)까지는 실로 매우 험난한 지역이고, 동소문에서 남쪽으로 동대문까지 역시 험조한 지역이며, 동대문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가 조금 평탄하기는 하나 성첩이 두텁고 완벽하니 족히 방어할 만합니다.” 지세가 높고 가파르다보니 적들의 침략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홍예 안쪽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지만,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문 주변에 새가 많아 용 대신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해 새들을 쫓고 악한 기운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로, 원형대로 복원됐다면 이곳을 찾는 이에게 혜화문의 가치를 더욱 일깨웠지 않았을까. 넓은 도로로 이제는 제자리를 찾는 게 어려워 보이는 혜화문. 하지만, 더 늦게라도 원형대로 제 모습이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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