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선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한폭의 산수화 같은 ‘풍류 놀이터’ 강릉 선교장을 가다

300년간 자연과 교감… 운치 가득
청아한 가야금 소리, 속세 때 벗겨
그 옛날 선비 왜 왔는지 절로 이해

‘관동별곡’ 지은 후 선비 발길 늘어
행랑 줄처럼 나란히 선 ‘줄행랑’
흉년 때 곳간 열어 주민 돕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흰 꽃물결처럼 내리쬐는 맑은 햇살. 그 따스함에 한옥 기왓장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달린 까치밥. ‘푸르륵’ 날아온 새도 이미 이곳을 사랑하고 있나 보다. 한옥 주위의 높지 않은 산줄기와 울창한 송림은 평온하게 둘러쳐져 바람을 막았다.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전통가옥의 운치와 조용함이 서리서리 온몸을 감싼다.

한폭의 산수화 속에서 금방이라도 꺼내온 듯한 이곳은 300년간 자연과 교감하던 강릉 선교장(船橋莊)이다.

정문에 발을 내딛자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청아한지 마음속에 낀 속세의 때마저 한꺼풀씩 벗겨져 내린다. 그 옛날 선비들이 왜 이곳을 찾았을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뒷산에서 바라본 선교장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천하의 명당

선교장은 조선시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이 지은 사대부 가옥이다. 경포호물이 들이차던 이곳에 배다리(船橋, 선교)를 놓아 건넌 데서 유래한 선교장. 1967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이내번은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이곳 명당 터를 발견하고 집을 지어 살게 됐다고 한다. 발전과 증축을 거듭해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 모습을 갖췄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悅話堂, 열화당), 별당, 사당과 연당, 정자(활래정) 등 모든 게 소중해 보인다. 큰 대문을 비롯한 12대문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후손인 이강백 관장이 이곳에 살고 있다.

▲ 활래정 안에 전시된 다기(茶器) ⓒ천지일보(뉴스천지)

◆시인묵객들의 풍류 놀이터

선교장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구경하기 위해 가는 시인묵객들의 풍류 놀이터였다.

조선시대 시인 정철 선생(1536~1593)이 강원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인 ‘관동별곡’을 지은 후, 조선 후기 사대부들에게 강원도 유람은 선비로서 꼭 한번 경험해야 할 풍류로 인식됐다.

지리적 환경 덕분에 ‘관동팔경’의 관문인 이곳 선교장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는지, 선교장 행랑채 안에는 의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동지방에 가장 문화적이고 발달된 도시가 강릉입니다. 그래서 경포호수, 바닷가 가까운 이 선교장 터에 자리 잡으셨죠. 유명한 시인이나 화가 등 많은 사람이 관동팔경에 다녀간 후, 서울에서 ‘내 거기 다녀왔다’고 하면서 큰소리치고 대화도 나눴습니다.”

유서깊은 고택을 보여주던 이 관장. 옛 모습이 그려졌는지 그의 입가엔 어느새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수많은 시간 동안 여행한 사람이 병들죠, 배고프죠. 노잣돈도 떨어지죠, 그러면 관동팔경의 중심에 있는 강릉 선교장에 와서 먹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간 거죠. 그러다 보니 자꾸 늘려진 게 현재의 모습이 됐습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니, 어느새 시선은 느릿느릿 한곳에 오래 머물렀다.

▲ 열화당과 행랑채 ⓒ천지일보(뉴스천지)

◆열화당과 행랑채

선교장 사랑채인 ‘열화당’도 특별했다. 1815년에 지어진 팔각지붕의 열화당은 3단의 장석대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이다. 이름은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구절을 인용했다. ‘친척들의 정다운 얘기에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독특한 테라스도 눈에 띄었다.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서 산업조사를 위해 강릉에 내려왔을 때 선교장 중사랑에 머물렀는데, 후한 대접을 받고 감사의 뜻으로 신식 현관 지붕을 선물했다고 한다.

열화당 정면에는 행랑이 줄처럼 나란히 있다. “예전에 줄행랑하면 사람들이 도망간다고 말하죠? 그 말이 선교장에서 나왔어요. 손님들이 여기 와서 하루든 한달이든 묵어가는데, 그럼 미안하잖아요? 다음 날 새벽에 문이 좌우에 있으니 빠져나가기 쉽죠? 그래서 ‘줄행랑친다’고 한 거죠.”

양반가의 자존심인 ‘솟을대문’도 있다. 양반이 말을 타고 들어갈 때 머리가 닿지 않게 하려고 솟아오르게 지었다고 해 솟을대문이라 불렀다.

 

▲ 흰꽃물결 같은 햇살 내리쬐는 활래정 ⓒ천지일보(뉴스천지)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활래정’

‘활래정’도 빼놓을 수 없다. 1816년 선교장 정원의 인공 연못 가운데 세워진 누각형식의 정자. 연못에 핀 그득한 연꽃에 마음이 심취된다. 가운데 만든 인공 섬의 두세 그루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과연 관동팔경을 지나는 풍류와 시인묵객들이 이곳 정자에 앉아 문호와 예술의 향기를 피웠을 법했다. 시 한수가 절로 나올 정도로 바라보는 풍광은 빼어났다.

정자명은 어떻게 지었을까.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半畝方塘一鑑開)/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안에 떠 있네(天光雲影共徘徊)/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무엇인가(問渠那得淸如許)/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 나오기 때문이지(爲有源頭活水來).’

이는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이다. 활래정의 ‘활래’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따왔다. 실제로 서쪽 태장봉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정자 앞 연못에 들어온 후, 다시 경포호수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 초정 옆에 탐스러운 감이 달려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유일한 초가로 된 정자 ‘초정’

선교장 가장 뒤편의 초정(草亭). 1820년 무렵 지은 초가로 만든 정자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시를 짓고 책을 읽던 곳으로, 초가에 사는 소작인들의 애환과 삶을 헤아렸다. 부유할수록 자신의 높아짐을 경계하고, 검소와 베풂의 덕을 배우며 상생의 도를 닦던 선비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흉년이 들 때면 선교장 곳간을 열어 여러 지역 주민을 도왔다. 넉넉한 인심으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던 선교장. 그 마음이 예뻤는지 따스한 햇살은 한옥 곳곳을 비춘다. 그늘 속에 잠자던 선교장은 햇살이 주는 생기에 숨결이 살아나는 듯 했다. 
 

▲ 강릉 선교장 위치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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