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조선조 500여 년 동안 각 임금들의 치세 기간 중에 인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의 재임 기간도 만만하지 않다. 퇴계, 율곡 등 우리에게 학문적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기라성 같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젊은 재상이었던 유성룡은 학문이 깊고 도량은 넓어서 국가의 중요한 대사와 외교문제는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와 채택되었다.

유성룡에게 운룡이라고 하는 형이 있었다. 너무나 명석하고 훌륭한 재상 아우를 둔 덕분에 그 형은 그늘에 가려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운룡을 어리석고 주변머리가 없다고 눈총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일가친척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 아우 유성룡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유성룡은 그런 형을 깍듯이 예우하고 집안을 단속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소홀함이 없도록 항상 보살피고 있었다. 그는 조촐한 별당을 만들어 형이 불편함이 없도록 조처하였다. 운룡은 별당에 들어 앉아 거의 바깥출입은 삼간 채 책읽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가 글을 읽으면 얼마나 깨우치겠느냐고 하인들까지 수군대며 이죽거렸다. 유성룡은 그런 형이 측은해 항상 섭섭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나라 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몸이다 보니 한 집안에서 형의 얼굴을 달포나 지나도록 못 볼 때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모처럼 한산해진 틈을 내어 유성룡은 형을 만나기 위해 방문을 나서자 마침 형이 찾아왔다. 평소 사랑채에도 나오지 않은 형이었다. 유성룡은 반가워 얼른 형의 손을 잡아끌며 방으로 안내했다. 두 형제는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 지경이라 다과를 들면서 실로 오랜만에 정답게 담소를 나누었다. 시간이 얼마쯤 흐르자 운룡이 아우에게 바둑을 한 판 두자고 제의를 했다. 유성룡은 나라 안에서도 국수의 칭호를 듣고 있는 대단한 실력가였다. 유성룡은 은근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형이 바둑을 두는 것은 본 적도 없지만 민망하나 바보 소리를 듣는 사람이 바둑을 둔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어쨌든 형의 제의가 놀랍기도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 하인에게 일러 바둑판을 내오게 했다. 하인도 놀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실력이 국수인 대감마님과 바보 형이 바둑을 두겠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온 집안이 그 사건으로 술렁대었다.

유성룡이 백돌을 잡고 형이 흑을 잡았다. 바둑이 시작되고 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유성룡은 되는 대로 판 위에 한 수 두 수 돌을 놓고 있다가 차츰 놀라고 있었다. 흑돌의 착지점이 허술한 듯하면서도 상대의 백돌과 조화를 이루면서 빈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바둑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형제는 바둑 삼매에 빠져 들었다. 한 판이 끝나고 계산을 해보니 흑돌을 쥔 바보 형이 한집 반으로 승리를 했다. 두 번째는 형이 백을 잡았다. 유성룡은 두 번째는 결코 질 수가 없었다. 명색이 자신은 국수 대접을 받는 실력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대결이 끝나고 계산을 해 보니 이번에는 두집 반을 진 시합이었다. 결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세 번째는 유성룡 자신이 자진해서 대결한 시합이었다. 전의를 불태우며 끝난 결과는 아우의 형편없는 불계패였다. 유성룡은 형에게 깨끗하게 승복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는 비로소 형의 진면목을 알아보았다.

유운룡은 아우와 차를 한 잔 나누면서 부드러운 말로 한 마디 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한 마디 할까 하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며 멀리 내다보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이네. 자신의 재주를 믿고 우쭐하여 권력을 누릴 형편에 있다고 교만 방자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야. 아우가 국수 호칭을 듣는 처지로 어리석은 바보 형한테 바둑을 지리라고 꿈엔들 생각했는가. 바로 이런 것이 세상살이의 불가사의인즉, 아우께서는 명망이 높을수록 몸과 마음을 삼가도록 하시게.” 유성룡은 끓어오르는 감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형에게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솔직히 유성룡 자신도 형을 온전하게 보지 않았었다. 그런 형이 바보는커녕 국량이 깊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성룡은 그런 훌륭한 형이 있어 역사에 업적을 남긴 인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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