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1990년 10월 8일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노태우 정권의 내각제 개헌 포기선언과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군의 정치개입 중지 등 4개항을 요구하면서 당사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평민당 의원들도 이날 의총을 열고 김 총재의 단식에 동조해 당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간다. 김 총재는 단식을 13일이나 계속하다 그달 20일 여당인 민자당이 지방자치제(지자제) 등을 긍정적으로 논의하겠다는 정국 타결안을 제시하자 중단한다.

여야는 이후 정치협상을 계속한 끝에 그해 12월 정기국회에서 ①1991년 6월 30일 이내에 지방의회 구성, ②1992년 6월 30일 이내에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 실시 ③1991년 3월 26일 시ㆍ군ㆍ구의회의원, 6월 20일 시도의회의원 선거 실시 등을 골자로 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현재 선거열기가 한창인 지방자치제도가 이 땅에 도입되기까지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 같은 목숨을 건 단식투쟁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어렵사리 도입된 지자제는 한국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긍정적 효과부터 짚어보면 중앙집권 일변도였던 정치가 지방으로 분산된 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민주화 세력이 각 지역을 거점으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고 이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밑바탕 역할을 했다. 또한 지역할거정치라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영남과 호남을 거점으로 한 김영삼, 김대중 등 양 김(金) 씨가 차례로 집권하는 데도 일조했다.

두 번째로는 단체장을 직접 뽑고, 지방의원을 통해 이를 감시하는 문화가 도입됨으로써 국민들이 일방적 통치행정에서 벗어나 생활정치라는 새로운 제도에 익숙해지게 됐다. 즉, 국민들이 지역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게 된 것이다.

또한 지방선거를 통하여 정치지망생들이 정치를 배우고 능력을 쌓아가는 터전이 된 점도 의미가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몇 자리를 제외하고는 정치를 경험하고 훈련할 기회가 전무하던 시절에 비하면 정치입문의 채널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지자제가 정착돼 가면서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부정적 측면도 확산돼 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부정적 측면이 더 두드러지는 추세여서 극단론자들은 지자제 무용론까지 펴고 있다.

부정적 측면은 첫째 지역구도의 고착화가 날로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때 지역 맹주를 자처하는 양 김 씨가 대권을 차지해 정치적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긍정적 효과가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부작용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어서 아이러니까지 하다. 특히나 영호남지역에서는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특정정당이 독점하는 폐해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의 주요한 작동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실종되는 현상으로 치달았다.

두 번째는 부정비리가 만연해가고 있는 점이다. 일부 단체장들은 선거 때 쓴 선거비용, 즉 본전을 뽑기 위해 공공연히 비리와 타협하려 한다. 국회의원과 달리 각종 인ㆍ허가권을 가진 단체장들은 항상 비리의 유혹에 노출되게 마련이고 역시 같은 정당 소속인 의회의 감시가 무뎌지면서 비리의 형태는 더 대담해진다. 심지어는 단체장과 지방의원들 간의 담합도 일상화한다. 여기에는 토호세력들이 지방권력을 장악하면서 지방정치인들의 질이 저하한 점에도 큰 원인이 있다. 일부지역에서는 연줄과 조직을 내세운 함량미달의 단체장이나 의원들이 재선, 삼선을 거듭하는 모순의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제가 근본적 문제로 자리하고 있다. 특정 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나 다름없는 특정 지역에서는 유능한 정치신인이 여론조사 등 인기투표식 경선제도의 벽을 통과하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 또 특정학교와 문중이 지방권력을 독과점하기도 한다. 비리가 악화하는 사실은 제4기 기초단체장의 거의 4분의 1이 사법처리가 된 점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않을 수 없듯이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힘들게 뿌리내린 지자제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자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정치권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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